▲<나인 테일러스>피터 윔지가 등장하는 대표적인 장편소설
동서문화사
그리고 수사를 위해서는 먼길을 나서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마법사 피터 윔지 경>에서는 피레네 산맥으로 날아가서 온갖 복잡한 무대장치를 마련한다. <나인 테일러스>에서는 혼자서 프랑스로 건너가서 현지 경찰과 함께 활동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먼 여행에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자신의 돈으로 부담한다.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귀족인 만큼, 돈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는 그저 이상한 사건에 뛰어들어서 그것을 즐길뿐이다. 이 정도면 가진 자의 여유가 느껴지는 귀족탐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피터 윔지도 전적으로 혼자서 활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마빈 밴터라는 이름의 집사가 있다. 피터 윔지가 어디로 여행을 가든 항상 따라다니는 사람이다. 1934년 작품인 <나인 테일러스>에서 밴터는 15년째 피터 윔지에게 고용된 상태였다.
밴터는 피터 윔지가 하는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불합리하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그를 전적으로 흠모하고 있다. 밴터에 대한 피터 윔지의 신용도 마찬가지다. 피터 윔지는 밴터를 가리켜서 '스핑크스를 연상시키는 인종'이라고 표현한다.
그만큼 밴터는 항상 침착하고 어떤 경우에도 동요하는 법이 없다. 오랫동안 밴터와 함께 생활했지만, 피터는 여전히 밴터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다. 피터는 '밴터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일이 책 한권 분량은 될 거다'라고 말할 정도다.
그러면서도 피터는 사건을 수사하면서 밴터에게 여러 가지 일을 주문한다. 어떤 인물의 뒷조사와 미행을 시키는가 하면, 정체불명의 인물을 추적하기 위해서 우편물을 가로채라고 주문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밴터는 특유의 입담과 기질로 그 일들을 수행한다. 밴터는 집사이면서 시종, 그리고 조수이기도 하다.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은 탐정, 피터 윔지피터 윔지와 함께 활동하는 또 다른 인물은 런던 경시청의 주임경감인 찰스 파커다. 그는 오래 전부터 피터를 알고 지내온 친구이자, 사건해결을 위해서 함께 움직이는 동료이기도 하다.
파커는 난해한 사건이 생기면 피터에게 의논한다. 피터는 경찰의 조직력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파커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그렇게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나면 피터는 밴터 또는 파커에게 자신의 추리를 요약해서 설명해준다. 말하자면 피터 윔지와 집사 밴터, 경감 파커가 협력체제를 이루면서 사건을 해결해가는 것이다.
피터 윔지가 언제나 침착하고 신사적인 태도를 가지고 일사천리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그도 실수를 할 때가 있다. <나인 테일러스>에서 실수를 범하고는 자신을 가리켜서 '탐정견의 가죽을 쓰고 짖고 있는 바보'라고 표현한다. 증거물을 경찰에게 넘겨주면서 노골적으로 흐뭇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피터 윔지는 조용하고 점잖은 귀족이면서, 동시에 여유와 유머감각을 잃지않는 신사기도 하다.
이런 귀족탐정을 창조한 여성작가 도로시 세이어스는 애거서 크리스티와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여성추리작가다. 1893년 영국에서 태어난 도로시는 무척 여유있는 환경에서 성장했다고 한다. 어린시절부터 승마와 스케이트를 배웠고, 10대 때 라틴어와 프랑스어, 독일어까지 익혔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만큼, 도로시가 만든 탐정이 귀족의 이미지를 지닌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 작가의 삶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녀 개인의 삶은 무척 어렵고 복잡했다. 일방적인 짝사랑을 하다가 파국을 맞았고, 곧이어 결혼을 했지만 그것도 실패였다. 남편은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서 아이를 갖고, 술에 빠져서 돈을 낭비하는 인생을 살았다. 작가가 35세 때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사망하기까지 한다.
이런 현실속에서 도로시는 오직 작품활동에만 전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피터 윔지라는 점잖고 여유있는 신사가 탄생한 것도 작가가 겪어온 개인적인 삶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부유하고 매력적인 영국의 귀족, 언제나 관대하고 유머감각을 잃지않는 신사 피터 윔지. 그는 도로시 세이어스가 불운한 삶속에서 투영한 그녀만의 이상형에 가까운 탐정이었다.
의혹
도로시 L. 세이어스 지음, 김순택 옮김,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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