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잡상을 이고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처마선 만큼이나 임금과 세자는 생각이 달랐다.
이정근
양녕의 상서를 받아 쥔 태종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경악 바로 그것이었다. 글을 다 읽어 내려간 태종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심한 현기증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태종은 역시 냉철했다. 격정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평정심을 되찾았다. 육대언(六代言)과 변계량을 불러 들였다.
“이 말은 모두 나를 욕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올바르게 하지 못한다’는 말인데 내가 만약 부끄러움이 있다면 어찌 이 글을 너희들에게 보이겠느냐? 모두 망령된 일을 가지고 말을 하니 내가 변명하고자 한다. 빈객은 답서를 준비하도록 하라.”태종은 손에 들고 있던 양녕의 상서를 변계량에게 건네주었다.
“이 일은 모두 망령된 것인데 어찌 답하여 줄 것이 있겠습니까? 정승대신으로 하여금 의(義)를 들어 꾸짖는 것이 가(可)합니다.”
“꾸지람은 꾸지람이고 답서는 답서다. 빈객은 어서 답서를 짓도록 하라.”
자식을 이기는 부모 없다는 태종 “어리를 양녕에게 돌려주고 싶다” 빈객 변계량으로 하여금 답서를 작성하도록 한 태종은 내관 최한을 한양에 보내어 좌의정 박은,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 찬성(贊成) 이원, 예조판서 김여지를 개성으로 속히 오라 명했다. 경덕궁에서 개성과 한양에 흩어져 있던 신하들을 한데 모아 긴급 대책회의가 열렸다.
“내가 세자의 글을 보니 온 몸이 송연(竦然)하여 가르치기가 어렵겠다. 경 등은 이미 사부(師傅)의 직임을 겸(兼)하였으니 함께 의논하여 잘 가르치도록 하라. 나는 관용을 베풀어 그 여자를 돌려주려는데 어떠하겠는가?”
“어찌 어리를 돌려 줄 수가 있겠습니까? 일찍이 그 여자를 제거하여 유혹을 끊어 버리는 것만 못합니다.”
박은이 반대했다. 아예 화근을 없애버리자는 것이다.
“세자가 어리에 대하여 끔찍이 사랑하다가 질고(疾苦)를 이루었다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먼 지방에 내쳐서 비밀히 통(通)하지 못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에 이와 같이 하였다면 반드시 이러한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변계량이 계책을 내놓았다.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옛 관례에서 방법을 찾겠다“이 아이는 비록 마음을 고친다고 하더라도 그 언사의 기세를 본다면 정치를 하게 되는 날 사람에 대한 화복(禍福)을 예측하기가 어렵다. 관용을 베풀어 그 여자를 돌려주고 서연관(書筵官)으로 하여금 잘 가르치고 키워야 마땅할 것 같다. 이와 같이 하여도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고례(古禮)에 의하여 이를 처리하겠다.”-<태종실록> ‘고치지 않는다면’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긴 하지만 예정된 복안이 숨어 있다. 어쩌면 그 복안을 실행하기 위한 수순이 이미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변계량이 작성한 답서를 내관 최한으로 하여금 한양에 있는 세자에게 전하라 명한 태종은 좌정한 신하들을 바라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청성부원군과 빈객은 남고 경들은 모두 물러가라. 긴히 할 얘기가 있다.”
모두들 물러갔다.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과 변계량이 남았다. 이들은 하륜 이후 태종 조를 떠받치고 있는 논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