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는 일제가 식민지의 인력과 물자를 강제동원해 전력화한 전시동원기였다. 1943년, 일제는 의무병역으로서 징병제를 실시하여 적령기에 이른 한국청년들을 징집하여 전선으로 보냈고, 이듬해에는 학병제를 실시하여 대학생들도 강제 소집하였던 것이다.
1943년, 육사는 다시 베이징으로 향한다. 시 “절정”에 드러난 절박한 현실인식이 그를 움직인 듯하다. 그는 국내에 무기를 반입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그게 그가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인 마지막 여행이었다. 모친의 소상 때문에 일시 귀국했던 그는 그해 늦가을에 피검,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던 것이다.
극한적 시대 상황 속에서 그 초극(超克) 의지를 다루고 있는 “절정”의 시상이 잉태되었다는 원촌 인근의 왕모산 갈선대에 오르면 육사가 자랐던 원촌의 생가터와 이육사문학관이 아련하게 멀다. 깎아지른 수직 벼랑 아래로 시퍼런 강물이 흐르고 일대의 들과 산이 유장하게 펼쳐진다.
미아리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던 그의 유해를 고향 원촌에 이장해 온 건 1960년이고, 낙동강변에 첫 시비가 세워진 게 1968년이다. '육사'의 이름을 딴 큰길이 낙동강변에 조성되었고 육사 탄신 100주년인 2004년에는 육사문학관이 생가터 인근에 문을 열었다. 이후 해마다 안동 일원에서는 육사문학축전이 열린다.
식민지 체제 아래서 일제에 맞서 반제(反帝) 구국의 길을 걸었던 육사의 삶은 열일곱 차례에 걸친 투옥과 구금으로 점철되었다. 일상적 탄압과 고문 속에서도 항일 투쟁의 전선을 떠나지 않았던 이 민족해방의 투사에게 4등급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것은 해방 45년 만인 1990년이다.
적극적 친일 활동을 통해 일제에 ‘보국(報國)’했던 시인 주요한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 받은 것과 견주어지는 대목이다. 주요한은 해방 후 민의원을 거쳐, 2공화국 시절엔 장관을 역임하는 등의 온갖 영화를 누렸다.
1979년 그가 죽었을 때 정부는 ‘정치·경제·사회·교육·학술 분야에 공을 세워 국민 복지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훈장’인 국민훈장, 그것도 1등급의 무궁화장을 수여했던 것이다.
‘친일’은 기만의 언어다. 그것은 ‘반민족’, ‘반민중’이라는 본질적 의미를 은폐하면서 지배적 기득권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포장한 왜곡의 어법인 까닭이다.
‘친일’이라는 어휘 속에는 피식민지 민중들의 고통스런 삶과 민족해방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독립투사들의 풍찬노숙의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근대화의 기초가 되었다는 민족사 왜곡을 통해 민족을 저버린 행위를 정당화하는 구차한 강변과 배반의 논리만이 있을 뿐이다.
▶ 1904년 5월 18일(음 4. 4)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당시 원촌동) 881번지에서 진성 이씨 이가호(퇴계 이황의 13대손)와 허길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 어릴 때 이름은 원록(源祿), 두 번째 이름이 원삼(源三), 자는 태경(台卿).
▶ 1919년(15세) 도산공립보통학교(보문의숙을 공립으로 개편) 1회 졸업.
▶ 1920년(16세) 대구(남산동62번지)로 이사.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에게서 그림을 배움.
▶ 1921년(17세) 안일양과 결혼, 백학학원에서 수학.
▶ 1924년(20세) 4월 학기에 맞추어 일본 유학.
▶ 1926년(22세) 베이징으로 감. 광뚱성 광저우 쭝산대학(中山大學)에서 후학기 수학.(‘이활’ 이름 사용)
▶ 1927년(23세) 쭝산대학에서 전학기 다니다가 여름에 귀국, '장진홍 의거(10월 18일)'에 연루되어 구속됨.
▶ 1929년(25세) 5월에 석방(12월에 무혐의로 종결). 중외일보 기자.
▶ 1930년(26세) 1월 3일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이활), 10월 <별건곤(別乾坤)>에 이활(李活)·대구 이육사(大邱二六四) 이름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 발표.
▶ 1931년(27세) 1월에 '대구격문사건'으로 구속, 3월 석방.
▶ 1932년(28세) 10월 10일에 난징 근교 탕산에서 문을 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학원(學員)으로 입교.
▶ 1933년(29세) 4월 20일 1기생으로 졸업(26명), 7월에 서울로 잠입.
▶ 1934년(30세) 4월에 <대중(大衆)> 창간호에 평문 “자연과학과 유물변증법” 게재, 3월 22일 군사간부학교 출신 드러나 구속됨. 6월 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방(8월 기소유예 확정).
▶ 1935년(31세) 신석초를 만나 친교. <신조선(新朝鮮)> 편집에 참여, 본격적으로 시(詩) 발표.
▶ 1939년(35세) 시 “청포도” 발표.
▶ 1940년(36세) 시 “절정”, “광인의 태양” 등 발표.
▶ 1943년(39세) 4월에 베이징으로 감, 충칭과 옌안으로 가 국내 무기 반입 계획 세움.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했다가 늦가을에 피검, 베이징으로 압송됨.
▶ 1944년(40세) 1월 16일 새벽,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에 의해 시신 거두어져 장례 치러짐, 원창에게 유골 인계되어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
▶ 1945년 동생 원조가 유시(遺詩) “꽃”, “광야”를 소개.
▶ 1946년 10월, “육사시집”을 서울 출판사에서 발간.
▶ 1956년 4월, “육사시집”을 다시 간행.
▶ 1960년 봄에 유해를 고향 원촌으로 이장.
▶ 1964년 9월, 시집을 “청포도”라 개제하여 서울 범조사에서 다시 발간.
▶ 1968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안동 낙동강 가에 “육사 시비(詩碑)” 제막.
▶ 1974년 미발표 유고 “바다의 마음”과 난초 그림 두 폭 발굴.
<이육사 문학관 홈페이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