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전.
안병기
석문을 지나고 또 바위 사이를 지난 다음 돌계단을 올라가자 비로소 관음암이 삐죽, 고개를 내민다. 관음암은 관음봉(983m) 아래 있다. 관음암을 '경업대토굴'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좀 전에 얘기한 전설 때문이다.
관음암은 서기 663년(신라 문무왕 3), 회월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전설은 그가 관음암을 창건한 것이 세수 60세 때였으며 168세때 입적했다고 전한다.
<산중일기>의 저자 정시한(1625~1707)은 1686년 10월 3일, 이곳에 도착해서 이틀을 머물고 나서 10월 5일에 법주사로 내려간다.
"4일 새벽부터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가끔 맑았다. <발휘심경> 34장을 보고 상권을 마쳤으며 <독서록> 상권과 <황정경> 하권 두어 장을 보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 관음사로 내려오니 혜영과 성해가 중노에 따라 와서 전송하였으며 염일이 따라 왔다가 다시 갔다. 명보가 물품을 지고 왔다가 갔다. 향로전에서 유숙하였다. 불존의 승려 법환이 이야기를 할만 하였다. 학능 일겸, 일원, 선찬이 모두 와서 보게 되었다."-정시한의 <산중일기>, 1686년 10월 4일치관음암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이곳에까지 와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다는 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나중에 통화해 보니 관음암 스님은 오전에는 불전을 지키지만 오후에는 출타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정시한이 "향로전에서 유숙하였다"라고 하는 걸 보면 17C말에는 꽤나 큰 절이었던가 보다. 그러나 오늘의 관음암은 아주 작은 불전 한 채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불전은 정면 3칸 정도의 크기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슬레이트를 덮었다. 벽돌 아니면 콘크리트 블록 쌓아 올려서 지은 조적식 구조를 가진 건물로 보이며 외부 벽면만 석재를 마감한 게 아닌가 싶다.
현판에 '관음전'이라 쓰여 있고,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도량이라고 해서 관음암이라 했다고 하니 안에는 관세음보살을 봉안했을 것이다. 석재로 마감한 왼쪽 1칸만을 불전으로 쓰고 새시 처리한 오른쪽 2칸은 요사로 쓰는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