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주인 지륜 스님. 원만한 인품이 엿보이는 얼굴이다.
안병기
중사자암이 언제부터 이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 알려진 바 없다. 전해오는 말로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의신 조사가 문을 열었다고 한다. 탈골암과 같은 시기다. 아무튼 중사자암은 조선시대에 들어 원종의 원당으로 지정되는 등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암자 역시 6˙25라는 민족적 비극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가 보다. 암자 전체가 불타버렸으니. 현재의 암자는 1957년 이후에 중건한 것이다.
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크기다. 중앙의 3칸은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좌우 2칸은 요사로 사용하고 있다.
불단 중앙에는 통견을 한 비로자나불이 봉안돼 있다. 비로자나 특유의 지권인을 하고 있다. 1950년대 중반 법주사 극락전에서 모셔온 것이라 한다. 불상 뒤에는 후불탱화가 있다. 후불탱화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세 분씩 보살이 그려져 있으며 양쪽엔 사천왕이 지키고 섰다.
"새벽에 거센 바람이 불었다. 하루종일 밤까지 비가 내렸다.밤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세수한 다음 옷을 차려 입고 앉아서 영천의 선묘를 우러러 생각하였다. 새벽에 꾸벅꾸벅 졸았다. 홍연이 아침 식사를 준비하였다. 설제가 일찍 와서 보았다. 조금 늦게 대암암에서 출발하니, 설제와 운밀이 전송하였다. 성희가 옷가지와 양식을 지고 중사자암에 도착하니, 암자의 승려들은 모두 나가고 단지 상좌 차현 만이 있었다. 뜰앞에 있는 암대에 올라가 도량을 둘러보니 별로 볼만한 것이 없었다. 한동안 앉았다가 차현으로 하여금 행장을 지게 하고 재 하나를 넘어서 상사자암을 바라보니 공허하였다."- 정시한의 <산중일기>, 1686년 10월 10일치"별로 볼 만한 것이 없"었던 정시한은 도착 즉시 중사자암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법주사에 있다가 올라온 지륜(智輪) 스님은 이곳에 사신 지 15년이 됐다고 한다. 이 스님은 외로움에 젖어버린 분일까, 아니면 초월한 분일까.
법당 오른쪽 칸 책장에는 각종 경전이 그득하다. <산중일기>라는 옛 책에 중사자암 얘기가 나온다고 했더니 책 이름을 다시 확인하시며 반색하신다.
다람쥐와 청설모를 우렁각시로 받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