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바엔 크게 쉬어라, 그래야 큰 깨달음이 온다

[속리산의 암자들 ②] 비구니 선객들의 도량 탈골암

등록 2007.10.08 18:46수정 2007.10.09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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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탈골암 가는 길에 만나는 천연 기념물 207호 망개나무 서식지.
탈골암 가는 길에 만나는 천연 기념물 207호 망개나무 서식지.안병기
탈골암으로 가는 길은 속리산 주 등산로에서 벗어나 있다. 세조가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나았다는 목욕소 가기 직전 삼거리를 지키는 이정표는 왼쪽으로 난 길을 타고 0.9km가량 올라가야 탈골암이 나온다고 설명한다.

법주사의 산내 암자인 탈골암은  비구니 스님들의 도량이다. 탈골암(脫骨庵)이란 이름은 암자 이름치고는 상당히 엽기적이다. 내가 처음 탈골암이란 이름에서 맨 먼저 떠올린 것은 접골원의 이미지였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내 몸의 어딘가에서 겉도는 뼈마디를 맞추려고 가는 중인가?


닦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길이 몹시 깔끔하다. 조금 걸어 들어가자 계곡이 나온다. 계곡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207호 망개나무 특별보호구역이라 쓰인 안내판이 보인다.

갈매나무과에 속하는 망개나무는 넓은 잎을 가진 낙엽관목이다. 잎 표면이 아주 진한 초록색이다. 6월에 연노랑 꽃이 피고 가을에 노란빛을 머금은 팥알만한 열매가 달려 점차 암적색으로 익어간다. 특별보호구역 안내판 바로 위에서 자라는 망개나무는 키 13.6m, 가슴 높이에서 잰 지름이 42cm 정도로 나이는 약 100가량 된 나무라고 한다.

혼자 걸어가는 길은 마음이 저절로 호젓해진다. 산자락 위로 흘러가는 구름과 물 소리가 오로지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이름이 엽기적인 암자 탈골암

 탈골암 전경.
탈골암 전경.안병기



그러나 흘러가는 구름과 물소리에 대한 내 소유권은 오랫동안 보장되지 않는다. 눈앞에 나타난 탈골암이 이미 천여 년 전부터 이곳의 구름과 물소리에 대한 소유권은 내게 있었노라고 못박듯 말하기 때문이다.

누가 창건했는지 모르지만, 탈골암은 서기 720년(신라 성덕왕 19) 창건했으며 서기 776년(혜공왕 12) 진표 율사가 중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면 무시무시한 탈골암이란 절 이름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그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진표 율사가 이곳에 도량을 열고 여러 제자를 깨우쳐 그들을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해탈케 했으므로 그 뒤부터 탈골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이야기는 신라 탈해왕 때 알에서 태어난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닭 머리를 한 자신의 외모를 한스러워하던 차에 마침 속리산 한 암자에 좋은 약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와서 그 물을 마시고 난 후 사람의 머리로 바뀌었는데 그 이후부터 탈골암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다.

내가 보기에 두 가지 이야기 중에서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 것은 아무래도 진표 율사 이야기 쪽이 아닌가 싶다. 김알지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왜 탈두암(脫頭庵)이라 하지 않고 탈골암이라 했겠는가.

아무튼 탈골암은 조선시대에 벽암 대사라는 분이 한 차례 더 중건했다고 하는데 6·25 때 불타버린 채 한 동안 빈터로 버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954년 두기 스님의 원력으로 다시 복원했는데, 본격적으로 불사를 일으킨 것은 1967년 영수 스님이 주석하면서부터라고 한다.

 법당인 약사전과 요사인 연화당.
법당인 약사전과 요사인 연화당.안병기


                          
 약사전 안.
약사전 안.안병기

 주변의 석탑부재들을 모아 조성해 놓은 3층석탑.
주변의 석탑부재들을 모아 조성해 놓은 3층석탑.안병기


애써 일으킨 불사였지만, 1993년 2월에 닥친 불의의 화마는 7평밖에 되지 않는 작은 법당을 태워 버리고 말았다. 그 후 1년 9개월 간의 공사를 거친 끝에 현재 탈골암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암자의 중심을 이루는 법당은 약사전이다. 안에는 약사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관음보살, 지장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은 대개 아미타여래상을 협시하는 보살인데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다는 건 이례적이다. 어쩌면 김알지의 전설을 암자 복원의 원력으로 삼고 싶은 매우 인간적인 배려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게 아닐까.

약사전 앞에는 석탑 1기가 서 있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가량 떨어진 옛 탈골암 터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잠시 바라보고 있노라니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석탑이 안쓰럽다.

대휴선원으로 가고자 요사인 운하당 앞을 지나서 계단을 올라간다. 운하당 위 축대에 놓인 장독대가 무척이나 정갈하다. 

번뇌로 타는 육신의 뼈와 살

 비구니 선객들의 수행처 대휴선원.
비구니 선객들의 수행처 대휴선원.안병기


 대휴선원 우측에 있는 삼성전.
대휴선원 우측에 있는 삼성전.안병기

대휴선원은 1990년에 문을 열었다. 이름은 조계종 총무원장과 법주사 주지를 지내시다 지난 1997년에 입적하신 월산 스님이 지으신 것이다. 대휴선원이 생김으로써 비로소 탈골암(脫骨庵)은 제 이름에 걸맞은 암자가 된 것이다.

'대휴(大休)'란 크게 쉰다는 뜻이다. 선방에 든 선객은 밖으로는 욕망을 쉬고 안으로는 금방이라도 깨침을 얻으려는 조급한 마음을 쉬며 수행에 임하라는 뜻이 아닌가 싶다. 번뇌로 타는 육신의 뼈와 살을 여읜다는 게 어디 호떡 뒤집듯 쉬운 일인가.

해제 철이라 선방은 텅 비어 있다. 이곳에서 하안거에 들었던 선객들은 지금 무엇을 하며 해제 철을 날까. 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선 제대로 된 쉼이 필요하리라. 이른바 속세 사람들이 말하는 '충전'을 하면서 곧 다가올 결제 철을 기다릴 것이다.

1977년에 지은 삼성전은 탈골암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이다. 안에는 칠성탱화, 산신탱화, 독성탱화 등이 봉안되어 있다.

 주차장 옆 각종 공덕비들. 전기가설공덕비→중창불사공덕비→선원 불사공덕비→진입로개설공덕비 순이다.
주차장 옆 각종 공덕비들. 전기가설공덕비→중창불사공덕비→선원 불사공덕비→진입로개설공덕비 순이다. 안병기


탈골암을 나서는 길에 주차장 옆에 있는 각종 공덕비들을 돌아본다. 전기가설 공덕비, 중창 불사 공덕비, 선원 불사 공덕비, 진입로개설 불사 공덕비 등이다. 비 가운데 가장 키가 큰 중창 불사 공덕비에는 이 암자의 유래와 각종 불사의 내력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러나 중창 불사 공덕비는 조그만 오류를 범하고 있다. 비문에는 "또한 신라 성덕왕 15년(720)에 창건되어 혜공왕 12년(776) 진표 율사께서 중건하시고"라고 돼 있는데 서기 720년은 성덕왕 19년이 옳기 때문이다.

느티나무 내부는 얼마나 치열했을까

 몇 백년 묵은 느티나무의 새 순.
몇 백년 묵은 느티나무의 새 순. 안병기


천천히 아까 올라갔던 길을 되짚어 내려간다. 계곡 가에서 몇 백 년은 됐음직한 느티나무 고목을 만난다.  대책 없이 세월을 먹어치운 탓인지 밑동이 아주 울퉁불퉁하다. 그 속을 뚫고 올라온 새 순이 앙증맞고 사랑스럽다. 이 느티나무는 묵은 뼈를 벗어버리고 이렇게 새 뼈로 갈아입었나 보다.

뼈를 벗어버린다는 것, 즉 환골탈태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뼈를 벗어버리겠다고 덤비는 것 자체가 보통 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해탈한다는 것은 치열함 없이는 결코 뚫을 수 없는 은산철벽이다. 저렇게 새순을 올리기까지 느티나무 내부는 얼마나 치열했을 것인가.

그런데 난 이 탈골암이란 '접골원'에서 어긋난 영혼의 뼈를 조그만큼이라도 맞추고 나왔는가. 적어도 탈골암에 오기 전보다는 세상을 향해 좀 더 확실한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는가. 다람쥐 한 마리가 입에다 상수리나무 도토리를 물고서 쪼르르 내 앞을 지나간다.

저 다람쥐는 뼈를 벗는 일 못지않게 사소한 일상도 중요하다는 걸 설하는 것인가.  에라,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은 그저 흘러가는 구름과 물소리에 대한 소유권이나 제대로 누리고 싶을 뿐인 것을.
#법주사 #탈골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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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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