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골목인사동 골목은 거미줄처럼 이어진다. 밤이면 원하는 골목을 찾는 일도 힘들다.
강기희
가을 냄새가 언뜻 난 것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거리를 걷는데 코 끝이 차다. 옷깃을 파고들던 가을이 여행객의 옷자락을 잡아 끈다. 복잡한 종로 거리를 피해 걷다보니 인사동이다.
내 정신의 키를 키운 곳 '인사동'
철 이른 낙엽이 깔린 인사동 길은 익숙함과 낯섬이 교차한다. 여행객이 되어 돌아온 인사동은 몇 해 전에 비해 달라져 있었다. 종로 거리에 있을 법한 낯선 상점이 그렇고 낯선 오락실이 그렇다.
인사동 사거리에서 차량이 다니는 큰 길을 버리고 골목으로 들어간다. 눈에 익숙한 간판들이 반갑다. 음식점에서 나오는 음식 냄새도 예전 그대로다. 파전이 그러하고 쉬직한 막걸리가 그러하다.
인사동을 인사동 답게 만드는 매력은 골목이다. 골목이 없는 인사동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거미줄처럼 이어진 골목은 숱한 역사를 만들어냈다. 깊은 밤 술에 취해 쓰러진 곳도 인사동의 골목이고 어찌어찌 찾아든 곳도 인사동의 여관방이었다.
다음 날 해장국을 사러 나온 이도 인사동으로 왔고, 해장국에 따라나온 해장술을 마시고 또 취해 쓰러진 곳도 인사동의 한 골목이었다. 인사동은 그렇게 내 키를 키웠고 마음을 키웠다.
허접했던 내 정신을 키운 것 또한 인사동의 헌책방과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낡은 책이다. 오래된 책 한 권 만나 골목 아무데나 퍼질러 앉아 그 책을 읽었던 기억은 인사동의 또 다른 추억이다.
젊은 날 인사동을 처음 만났을 때는 피가 끓었다. 거리에서 마주친 이들과 스스럼없이 막걸리 잔을 나눈 곳도 인사동이다. 서로의 이름 따윈 애당초 중요하지 않았다. 서로 마음만 맞으면 거리에서 술판을 폈다.
가을빛 스며드는 인사동은 보헤미안의 거리
인사동은 보헤미안을 위한 거리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인사동에 오면 마음이 풍성했다. 거리를 떠도는 것들은 눈으로 보기만 해도 양식이 되었다. 정신의 영양실조는 인사동에서만 극복이 가능했다.
인사동 골목에서 문학을 줍고 그림을 줍고 사진을 줍는 동안 내 정신의 키는 훌쩍 자라 있었다. '장수막걸리' 한 사발에 녹아 있는 사람들의 정은 가슴시린 이의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오랜 만에 찾은 인사동의 골목은 여전히 연애가 흐르고 이별이 흘렀다. 골목 한 편에서 눈물 짓는 한 여인의 야윈 목에는 푸른 스카프가 둘러져있고, 불어오는 바람은 여인의 눈물을 잦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