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에 걸친 항일무장투쟁 가계도. 차도선의 아들과 손자 등은 모두 항일투쟁에 투신한다. 유례를 찾기 힘든 항일투쟁이지만 그의 역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조호진
일본군은 차도선이 탈주하자 그의 집에 불을 지르고,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차도선의 아내와 친형 차도심에게 인두질 등의 고문을 가했다. 고문 끝에 풀려난 아내는 1916년 3남1녀의 자식과 조카 차원식(차도심의 외아들)을 데리고 중국 무송현으로 떠났다. 가는 길에 굶주림이 심해지자 외동딸을 민며느리로 주었고, 딸의 이름과 행방은 알 길이 없다.
차도선의 아내는 1940년 10월 사망했고, 일본 경찰의 고문에 시달리다 도주한 차도심은 동생 가족과 합류해 살다 1933년 73세로 사망했다. 차도심은 대장간을 운영하면서 양포(洋砲 양총), 칼, 화약, 탄약 등을 제조해 의병부대에 공급하는 등으로 동생의 의병투쟁을 도왔다.
1919년 4월 신봉황(申鳳荒) 등과 함께 충의사(忠義士)를 조직해 만주의 황국보(黃菊甫) 등과 연락하여 200명의 독립군을 모집해 훈련시키고, 같은 해 9월에는 무송현에서 500여명의 독립군 등을 훈련시키는 등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무렵 나이(60대 중반에서 후반 추정)가 들어 무장투쟁이 어렵게 되자 '왜놈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두메산골에 가서 살겠다'며 무송현의 첩첩산중인 두지동에 들어가 만년을 보낸다. 차도선은 12가구 50~60명이 사는 이 마을에서 자신의 집을 서당식 학교로 꾸민 뒤 마을 어린이 10여명에게 반일 계몽교육을 10여년간 시켰다.
차도선은 1938년 3월 일제에 참변을 당한다. 중국 동북3성에 괴뢰만주국을 세운 일제가 무장투쟁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마을을 소개(疏開)시키기 위해 두지동 전체를 불 지른 것이다. 고령의 독립운동가(당시 74세)는 자신의 집과 마을이 잿더미로 주저앉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인근 동대툰 집단부락으로 소개된 차도선 새로 살 집을 짓다가 병을 얻어 1939년 2월 8일 무송현 추수동 동대툰에서 75세 일기로 눈을 감는다.
집안 사내들은 모두 항일투쟁으로... 그러나차도선의 아들과 손자 등 집안의 사내들은 모두 항일투쟁에 투신했다. 그의 세 아들 가운데 맏아들 리덕(1889년생)은 아버지와 홍범도가 무장봉기를 선포할 때 의병대원으로 부친의 독립투쟁에 합류한다. 리덕은 경술국치(1910년) 이후 중국 남만과 동만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전투에 참가할 수 없게 되자 두지동에서 농사를 짓는다.
1942년 무송 '공산당 사건'으로 검거 선풍이 일면서 중국 공산당원 등 61명이 일제에 체포돼 14명이 사형당하고 5명이 무기징역에 처해진다. 리덕은 둘째 동생 운학, 셋째 동생 원복과 함께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으로 풀려난다. 몽강현 2도화원구 소가영촌에서 농사를 짓던 리덕은 일제의 고문으로 쇠약해진 데다 항미원조에 나간 맏아들 두천이 전사했다는 비보를 듣고 몸져누웠다가 1953년 2월 65세 일기로 눈을 감는다.
리덕은 슬하에 2남3녀를 두었다. 리덕의 맏아들 두천(1924년생)은 아버지와 함께 반일 지하운동에 참가했다가 무송 '공산당사건'에 부친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두 달 만에 가석방되었다. 1945년 6월 일제에 강제 징집된 두천은 흑룡강 해라얼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일본군이 패전하자 도주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두천은 1946년 결혼 2개월 만에 동북민주련군(조선항일유격대와 중국인민혁명군이 통합된 부대) 일원으로 해남도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1949년 항미원조로 조선전선(6·25전쟁)에서 중상을 입고 숨졌다. 리덕의 둘째 아들은 일곱 살에 요절해 이름조차 알길 없다. 맏딸과 둘째딸은 출가한 후 젊은 나이로 사망했으며, 셋째 달 궁녀는 중국 휘남현에서 살고 있다.
차도선의 둘째 아들 운학(1895년생)은 어머니와 함께 무송현 두지동으로 이주한 후 항일독립운동과 항일지하사업에 참가했다. 1942년 무송 '공산당 사건'으로 봉천 감옥에서 복역하던 운학은 해방을 넉 달 앞둔 1945년 4월 15일 탈옥 주모자로 간주돼 총살형에 처하면서 51세의 일기로 비운의 일생을 마친다. 운학의 하나뿐인 아들은 1946년 15세에 간질병으로 사망했다.
항일투쟁과 사형, 투옥, 고문... 묻혀진 '비운의 가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