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암일기고산의 손자인 윤이후가 8년가량의 일상을 기록한 일기다.
정윤섭
양반사대부가로서 성리학을 실천하며 살았던 해남윤씨가 또한 이러한 사회질서 속에 살아야 했는데 이러한 사회이념 속에 희생당한 여인이 고산 윤선도의 둘째 며느리인 윤의미의 부인이자 공재 윤두서의 친 조모다.
고산 윤선도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아들인 의미는 고산의 나이 50살 때 24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당시는 남편이 죽으면 부인이 남편을 따라 죽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여필종부의 사회윤리가 팽배한 사회였다. 사대부가의 위세를 떨치고 있었던 해남윤씨가였던 만큼 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리라.
의미의 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기 위해 절식(음식을 끊음)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의미의 부인은 뱃속에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아마 이쯤에서는 당시 누구라도 만류를 했을 것이다. 고산 또한 이같은 상황에서 며느리의 절식을 만류하고 아이를 낳도록 한다. 이에 따라 의미의 부인은 아이를 낳게 되지만 아이를 낳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절식을 하여 남편의 뒤를 따르게 된다.
지금 생각하면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당시는 사대부가의 며느리가 남편을 위해 목숨을 바쳐 지조를 지킨다는 것은 집안의 자랑이었다. 아마 해남윤씨가에 있어서도 고산이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이때가 성리학적 종법질서가 더 무겁게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때 태어난 이가 윤이후(爾厚)로 이후는 천재적인 화가였던 공재 윤두서의 친아버지가 되는데 윤이후의 출생은 비극적인 당시대의 사회상황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를 친아버지로 하였던 공재 윤두서는 나중에 큰집으로 양자를 가 종손으로서 가업을 잇게 되는데 이때 양자로 택한 것은 고산이었다.
윤이후의 어머니가 그를 낳고 얼마 후에 절식을 하고 죽은 것은 죽은 남편을 따라가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당시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배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윤이후의 어머니는 사대부집의 며느리로서 성리학적 윤리관 속에 희생당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지배이념이 사회를 차지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러한 질서에 따라가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당시 임진왜란으로 인해 온 강산이 황폐화되고 조선의 여인들이 능욕을 당하는 혼란한 현실 속에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지배층에서 더 강요하였던 성리학적 사회윤리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여인들에게는 가혹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후기 열녀들의 지조와 절개를 기록한 '삼강록'이 발간되어 배포되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고산의 문학성 이어받은 윤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