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얘기가 나온 김에 홍성담의 작품 ‘농부’를 화제로 올렸다. 절개된 보리밭 땅 속에 한 명의 주검이 누워 있고, 그 주검 위에 푸른 보리가 자라는 모습이다.
총칼에 희생된 그들은 필시 이 땅 어딘가에 묻혔을 것입니다. 그 주검들이 거름이 되어서 과일나무가 자라고 곡식이 자라는 겁니다. 내가 그 과일과 알곡을 먹음으로써 그들이 항쟁 때 목숨을 내던지며 이루고자 했던 세상의 모습들이 비원이 되어서 내 몸속으로 들어오고, 나는 다시 그들이 원했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해야 하고…. 이런 순환의 원리를 표현한 것이죠. 아직까지 그렇게 해석해준 평론가가 없었는데 오늘 엇비슷한 해석을 듣네요.”
이제 홍성담이 광주항쟁의 정신을 구현하고자 벌였던 민중미술운동과, 그로 인한 박해에 어떻게 맞서왔는지를 탐색해 보자.
- 팸플릿에 올라 있는 연보를 보면 1980년 7월 5일 나주에서 야외 전시회를 가진 것으로 돼 있다. 광주항쟁이 진압군의 총탄에 제압된 직후인데 이런 행사가 가능했었나요?
“전시회라기보다는 광주 영령들에 대한 위령제 성격의 퍼포먼스였습니다. 본래 1980년 7월쯤 광주자유민술인회 회원들이 전시회를 갖기로 했었는데, 광주항쟁으로 계획이 무산되자 그대로 넘길 수 없다고 판단해서 나주 벌판에 미술작품을 살치하고 광주영령들을 추모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게 된 것입니다.”
- 그 무렵 판화작업에 몰두한 것으로 아는데 왜 판화를 선택했습니까?
“목판화를 주로 해왔는데 목판화는 칼로 깎고 파고 다듬기 때문에 뭐랄까, 손맛이 살아 있지요. 광주항쟁 끝나고 나서 항쟁의 진실을 세계인권단체 등에 알릴 수단을 찾다가 5월 연작판화 작품 50점을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저를 판화가 홍성담, 그러는데 저는 판화가가 아니고 서양화가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1980년대 민중미술의 마지막 백미라면 당시 유행했던 걸개그림일 것이다. 홍성담으로 하여금 콩밥, 아니 ‘개밥’을 먹게 만든 작품이 바로 대형 걸개그림이었던 공동창작품 ‘민족해방운동사’였다.
“갑오농민전쟁에서부터 통일운동까지의 운동사를 민중화가 70여 명이 달라붙어 11개 섹터로 나눠서 몇 달 동안 진행했던 대형작업이었습니다. 작품 하나의 크기가 높이 2.4m, 길이 7m에 이르렀는데 그런 작품이 11편이었으니 전체 길이가 77m나 되었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민족해방운동사’는 전국 순회전시를 하는 한편으로 슬라이드로 제작하여 미국 교포에게 보내졌다. 당시 평양축전에 참가할 재미교포 대표단은 그 슬라이드를 대형 사진으로 현상해 북한에 가지고 들어갔는데 그들은 홍성담 등 작가들이 북녘의 청년 학생화가들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한 메시지를 소지하고 있었다.
“이 민족해방운동사 그림은 남쪽 청년학생들이 그린 반쪽의 근현대사다. 따라서 너희들의 관점에 따라 나머지 짝을 맞춘다면 작업이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이런 메시지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북쪽 청년화가들은 세 작품을 더해 대형 걸개그림 ‘민족해방운동사’를 완성했고, 북녘 4대도시를 돌며 전시회를 열었다.
그래, 그러니까 1989년 7월 31일, 홍성담은 광주에서 안기부 수사관들에게 체포, 연행됐다. 당시 홍성담을 비롯하여 민족해방운동사 작업을 함께 했던 젊은 화가들은 민족민중미술운동 전국연합 건설준비위원회(‘민미련 건준위’)를 구성하여 활동했는데 안기부는 이 단체를 이적단체로 규정했던 것이다. 당시 홍성담을 변호하기 위해 민변의 김선수 변호사가 선임되었는데 김 변호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나는 홍성담씨가 서울구치소로 송치된 뒤인 8월 24일에야 접견할 수 있었는데 사태가 몹시 심각하다고 느꼈다. 안기부 수사관들은 홍씨에게 북한에 다녀왔다는 자백을 강요하면서 구둣발로 정강이를 차고 주먹으로 얼굴과 머리를 무수히 구타하고 야전침대로 손바닥을 때려 손이 새파랗게 멍들었으며….”
무엇보다 참기 어려운 것은 물고문이었다. 홍성담은 훗날(1999년) 가나아트센터에서 탈옥(脫獄)이라는 제목의 기획전을 열었는데 ‘욕조-어머니 고향의 푸른 바다가 보여요’라는 작품을 통해 물고문을 고발하고 있다. 검은 손들이 그의 머리를 물이 담긴 욕조에 넣고 짓누르는데, 대책 없이 욕조에 얼굴을 처박은 채 먼 고향의 바다 속을 상상하는 것,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았고 형기를 다 채운 뒤 석방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본안 사건과는 별개로 고문수사관의 처벌을 요구하기 위해 고문 증거보전신청을 냈는데 서울대병원의 감정소견이 받아들여지면서 진행된 고문수사관에 대한 고소사건이었다.
“고문한 수사관을 고소하려면 그 대상을 특정해야 하는데 저한테 고문을 가했던 안기부 수사관의 이름을 알 수 없잖습니까. 그래서 제가 고문수사관 두 명의 얼굴을 확실히 기억하니까 몽타주를 그리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재판부에서는 나라에서 인정하는 공모전에 입상경력이 있는 사람의 그림이라면 인정할 수 있으나 홍성담 같은 ‘재야 민중화가’의 그림은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민중화가 홍성담이 국전 따위에 응모했을 리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홍성담이 김선수 변호사에게 획기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
“변호사님, 원래 대학생은 국전에 응모할 수 없었는데 제가 대학 3학년 때 학생신분이라는 사실을 속이고 국전에 응모하여 입선한 경력이 있습니다. 1976년도 국전이니까 문화부에 가서 자료 찾아서 첨부하세요.”
홍성담은 그 동안 국전에 입선했다는 것이 민중 미술판에서는 전혀 자랑이 아니라서 감춰왔는데 ‘개똥도 약에 쓸 데가 있더라’며 웃었다. 그는 변호사 접견 시 몽당 4B연필과 지우개 하나를 건네받아 팬티 속에 감추고 감방으로 돌아가서 책 표지 안쪽의 백지를 뜯어낸 다음 담요를 뒤집어쓰고 고문 수사관 두 명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홍성담은 ‘평생을 통틀어 가장 진지하고도 열심히 그렸던 그림이 바로 그 캐리캐처였다’고 술회한다. 그렇다면 홍성담의 그 몽타주 그림은 성공적이었을까? 그림은 몰래 반출돼서 복사본이 <한겨레신문> 등에 공개되기도 했는데, 얼마 뒤 노동운동을 하던 한 서울대생이 안기부를 거쳐 서울구치소로 송치돼 홍성담을 만났다. 그와 홍성담이 나눈 대화가 이랬다.
- 홍 선배님, 안기부에서 그놈 봤습니다. 선배님 고문했던 그놈 말입니다.
- 그걸 어떻게 알았나?
- <한겨레신문>에서 본 얼굴하고 똑같이 생긴 놈이 있기에 제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그 수사관이 ‘홍성담, 그 놈이 내 얼굴을 그려가지고…’ 어쩌고 하면서 투덜대더라구요.
그러나 홍성담의 탁월한 얼굴묘사에도 안기부가 “그렇게 생긴 수사관은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고문 수사관 고소 사건은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물고문을 할 때, 그들은 기술적으로 숨 넘어가기 일보 직전에 꺼내줍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칼날보다 더 얇아요. 그 지경을 경험하고 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게 됩니다. 고문하는 사람이 하느님처럼 보이고 심지어 오늘만이라도 안 맞고 물고문 안 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비굴하게 아양을 떨게 됩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석방된 뒤에도 계속되는 물에 대한 공포감이었습니다.”
마실 물 한 잔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엄습하는 물고문의 공포에 떨기도 하고, 더군다나 섬에서 자란 그에게 삶의 터전이었고 꿈이었던 바다가, ‘바다’라는 원 개념으로 인식되지 않고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지도 모르는 ‘공포의 대상’으로 연상될 때의 배반감은 치떨리는 기억이었다고 얘기한다.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이제 민중미술에 대한 시각 또한 예전 같지 않다. 그럼에도 유독 홍성담, 그에게는 ‘민중미술의 기수’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그렇게 규정되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물었다.
“1990년대 말이나 2000년대 초에는 거부감이 많았지요. 난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닌 그냥 화가인데 왜 한 편에 가둬버리려 하는가, 그런 불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운명이려니 여깁니다. 제가 해마다 서너 차례 해외에서 작품을 전시하는데 한국미술에 조예가 깊은 독일의 한 평론가가 이런 얘기를 해요.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한국이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현대미술은 민중미술밖에 없다. 1980년대의 소중한 경험과 정신을 한반도에만 가둬두지 말고 인류애를 확장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요즘 그가 하는 작업에 눈길이 간다. 그의 작업실에는 일본의 야스쿠니를 형상화한 작품들이 걸려 있다. 한국, 대만, 중국, 일본의 지식인들로 엮여진 ‘안티 야스쿠니 연대’가 주축이 돼서 오는 11월 5일 유엔본부 앞에서 집회를 열 예정인데 그때를 맞춰서 홍성담의 야스쿠니 연작도 대만 일본 미국 유럽 등지를 돌며 전시될 예정이다. 이제 한국을 넘어 야스쿠니와 한 판 붙겠다는 것이 민중화가 홍성담의 야무진 결의다.
덧붙이는 글 | 이상락 님은 소설가로 <난지도의 딸> <동냥치 별> <누더기 시인의 사람> 등의 작품을 펴냈다.
2007.09.27 12:08 | ⓒ 2007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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