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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대세론은 이회창씨 개인의 장점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우선은 참신함이었습니다. 당시 국민들 중 다수는 오랜 세월 동안 한국정치를 지배해왔던 3김정치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를 이회창씨에게 기대했습니다. 정치 초년병이면서도 중량감이 느껴지는 그에게서 3김정치 청산의 명분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시까지 대한민국 정치사는 평화적 정권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 민주계와의 당내투쟁에서 보여준 이회창씨의 권력의지 등도 이회창 대세론의 중요한 근거였습니다.
한편 이회창 대세론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회창씨 개인의 이미지는 신선하였지만 그가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세력이 군사정권의 주류였던 민정계라는 점이 그것이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과의 차별화 속에서 자신의 대세론을 유지해 왔지만 민주계와의 반목 역시 그에게는 잠재적인 불안 요인이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이회창 대세론은 화려했지만 그 이면에는 얼마든지 역공을 받을 수 있는 어두운 그림자가 잠복해 있었습니다.
후보선출 직후 이내 대세론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7월 25일 이회창 후보 아들들의 병역비리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당시 천용택 의원(국민회의)은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의 아들들이 애초 신체검사에서는 현역입영대상인 갑종판정을 받았으나 입영 연기신청 후 수년이 지나 입대할 당시에는 체중미달로 징집면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이회창 대세론에 포문을 열었습니다.
대세론은 허망할 정도로 쉽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갤럽의 7월 31일 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는 김대중 후보에 다소 앞섰으나 그의 지지율은 27.8%로 폭락했습니다. 그러다 보름도 채 되지 않은 8월 13일 이회창 후보는 김대중 후보에게 26%대 28%로 역전을 허용하고 맙니다.
이때부터 대세론은 급속도로 소멸했고 이회창 후보는 이인제씨의 독자출마라는 잠복해있던 복병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여기에 DJP연합이라고 하는 판세의 변화, 그리고 IMF라고 하는 최악의 국란까지 맞물리며 오랜 기간 동안 국민들에게 회자되었던 이회창 대세론은 정반대로 이회창씨의 대선 패배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회창 대세론은 왜 이렇게 허약했던 것일까요? 대세론의 붕괴를 단순히 아들들의 병역비리 때문만이라고 해석해도 좋은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2002년 또 다른 대세론의 탄생과 소멸을 정리해 본 후 이 문제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2002년, 이인제 대세론의 탄생과 붕괴2002년 대선에서도 이회창 대세론은 맹위를 떨쳤지만, 이회창 대세론의 탄생과 붕괴는 노무현 바람의 탄생과 위기 그리고 부활이라는 흐름의 종속변수에 그쳤습니다. 노무현 후보의 탄생과 더불어 이회창 대세론은 수그러들었고, 노 후보가 위기를 겪을 때 슬그머니 살아났으며, 후보단일화를 통해 노후보가 부활했을 때 대세론은 다시 자취를 감췄습니다. 한마디로 2002년 대선은 노무현 후보를 상수로 해서 치러진 선거였습니다.
2002년 대선의 대세론에서 교훈을 얻으려면 이회창 대세론보다는 이인제 대세론을 살펴보는 것이 낫습니다. 새천년민주당의 창당과 함께 구여권에서 신여권으로 옮겨온 이인제씨가 어떻게 대세론을 구가했는지, 그 대세론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살펴보아야 오늘의 현실에 일정 정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이인제씨는 당내에서 대세론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인제씨는 1997년 대선 직후 새롭게 창당한 새천년민주당에 합류하면서부터 유력한 차기 대통령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위는 김대중 대통령 집권 기간 내내 유지되었습니다. 1997년 대선에서 얻은 500만 표가 그의 큰 무기였으며,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도운 숨은 공로자라는 세간의 인식이 그가 당내에서 대세론을 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이었습니다.
정치적 뿌리가 다른 그가 김대중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새천년민주당에서 착근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일부의 회의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인제씨는 대통령 후보 경선이 치러지기 직전까지도 대세론을 구가했습니다. 동교동계의 지원에 힘입어 이인제씨는 당내 대세론을 굳게 지켰고, 본선 경쟁력과는 별개로 이 대세론은 꺾이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