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론으로 흥한 자 대세론으로 망한다

15, 16대 대선의 대세론을 통해 본 2007년 대선

등록 2007.09.23 12:03수정 2007.09.23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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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대통령이 다 된 듯이 보도되는 분이 있습니다. 대통령 선거는 '해보나 마나'이고 이기는 것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말하는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제 기억에 15, 16대 대선 과정에서도 지금과 같은 대세론이 극성을 부렸습니다.

저는 이 대세론처럼 우리 시대, 정당 정치의 극복 과제를 여실히 보여주는 단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대세론은 정의롭지 못한 기회주의 역사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때그때의 전세에 따라 재빨리 줄서기를 해야 했던 낙후한 정치 문화에서 대세가 어디냐고 사람들은 늘 물어보았습니다. 민심이고 역사의 흐름이고 따질 것 없이 일단 센 사람이 나타나면 거기에 재빨리 줄을 서야 했던 비정상적인 사회정치문화가 대세론이란 개념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둘째, 대세론은 정당이 국민을 효과적으로 대표하지 못하고 많은 유권자들이 관망자의 위치에 서 있는 정당 정치의 낙후성 때문에 더욱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더 자세히 다투거나 싸울 것도 없이 분위기와 규모의 위세로 상황을 끝내자는 전략이 대세론이기도 합니다.

지지정당 여부를 묻는 여론조사에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늘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답변하고 있습니다. '지지 정당이 없다, 나는 정치를 잘 모르고 관심 없다'란 정치 현실에서 나온 것이 대세론이라는 전략입니다. 지지정당 없이 관망하거나, 그래서 투표에 대해 별다른 정보가 없을 수밖에 없는 유권자들에게 효과적으로 다가가는 선거 전략이 대세론이기 때문입니다.

민도가 낮고 민주주의 수준이 아직 미숙했던 시절에 대세론은 효과적인 전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미 이 대세론의 수준은 벗어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5, 16대 대선이 있었던 1997년과 2002년의 경험이 이걸 잘 보여줍니다.

국민은 설령 지지 정당이 없다 해도 대통령 선거의 중요성을 충분히 감안하여 신중하게 평가합니다. 국민의 수준이 높아져 있습니다. 고무신 한 짝, 막걸리 한 잔, 장터에서 떠도는 풍문 같은 대세론으로 자신의 주권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대세론에 의지하고픈 사람들은 늘 간과했습니다. 여기에 인터넷 정보통신 환경이 더해져 대한민국 유권자들은 대세론이라는 허장성세 전략으로 속여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15, 16대 대선의 각 당 예비 경선 및 본 선거에서 대세론을 펼치던 모든 후보들은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세론에 현혹되어 '묻지 마 동반투자'식의 정치 행태를 보였던 모든 정치인들은 망신살을 뻗쳐야 했습니다.

대세론과 '묻지 마'식 투자는 이미 낡은 전략


결국 우리의 짧은 자본주의 역사와 주식투자의 역사를 비추어서 생각하면 이 대세론의 낙후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황태자주니 황금주니 하며 주식시장의 잘못된 여론에 속아 '묻지 마'식 투자를 하면 반드시 망한다는 사실을 우리 주식 투자가들은 이제 잘 알고 있습니다. 각 기업의 회계가 불투명하고 권력과 기업의 유착관계가 시장원리보다 더 강력하게 작동할 때 주식투자가들의 투자 기법은 어디가 대세인가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선진국의 주식시장에서 이런 '묻지 마'식 투자 전략은 성립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워렌 버핏이나 세계 주식 시장의 유수한 투자 귀재들이 하는 말은 한결 같습니다. '주가변동에 겁먹지 말고 인내심 있게 기업의 가치에 기초한 성장 잠재력에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1997년과 2002년 두 차례의 대선은 이른바 대세론의 허황됨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 두 차례의 대선 과정에서 우리는 대세론이 마치 마술처럼 붕괴하던 모습을 뚜렷이 목격했습니다. 각 당의 경선과 본선에서 50%가 넘는 지지율을 자랑하며 대세론을 설파하던 그들의 그 전략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습니다. 사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서동요'를 퍼뜨려 성(城)을 공략하던 시절과는 질적으로 다른 수준에 와있기 때문입니다.

15대, 16대 두 차례의 대선에서 대세론의 주역은 이회창씨였습니다. 2002년의 경우는 후보경선과정에서도 대세론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여권의 예비후보였던 이인제씨가 이른바 대세론을 앞세우며 경선 초반의 판을 주도해 나갔습니다. 대세론으로 대선 국면을 주도했던 이회창, 이인제씨의 대세론은 그러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이들의 대세론은 왜 실패했습니까.

지금도 대세론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이명박 대세론', '손학규 대세론', '정동영 역대세론'이라는 말들이 그것입니다. 15대, 16대 대세론을 통해 이들 대세론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민주주의 정당 정치에서 이 대세론이 얼마나 잘못된 전략이고 수준 낮은 논리인지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1997년 이회창 대세론의 붕괴를 말하기 전에 우선 대세론이 탄생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회창 대세론은 그보다 한 해 전인 1996년의 신한국당 후보 대세론에서 출발합니다. 대선을 1년 앞둔 1996년 신한국당이 재집권을 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습니다. 당시 신한국당에는 이회창, 박찬종, 이인제, 이홍구, 이수성 등 이른바 9룡이라 불리는 차기 대권 주자군이 형성돼 있었고, 세간의 관심은 온통 누가 후보가 되는가에 쏠려 있었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누구든 신한국당 후보만 되면 대선에서 무조건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대권 4수생, 호남 출신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로서는 비호남 연합구도를 이길 가능성이 1%도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1996년 10월 <경향신문>이 실시한 신한국당 대선후보 지지도 조사에서 박찬종 후보는 29.9%, 이회창 후보는 26.2%로 나타났습니다. 이인제, 이홍구 후보 등은 지지율이 5%대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수치는 1997년에 이르면 크게 변하게 됩니다.

1996년 말의 노동법 날치기로 김영삼 대통령의 지지율이 꺾이면서 신한국당 내의 주도권은 민주계에서 민정계로 넘어갔고 민주계의 견제를 받던 이회창씨가 선두주자로 부각되었습니다. 결국 1997년 7월, 신한국당은 이회창씨를 후보로 선출했습니다. 이회창 후보가 얻은 표는 6922표, 2위였던 이인제 후보가 얻은 표는 4622표였습니다.

당시 야당에서는 국민회의를 창당하며 재기한 김대중씨가 유력한 경쟁자였는데, 이 무렵까지 김대중씨는 단 한 번도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씨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이회창 대세론은 거의 정설로 굳어져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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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 대세론은 이회창씨 개인의 장점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우선은 참신함이었습니다. 당시 국민들 중 다수는 오랜 세월 동안 한국정치를 지배해왔던 3김정치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를 이회창씨에게 기대했습니다. 정치 초년병이면서도 중량감이 느껴지는 그에게서 3김정치 청산의 명분을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시까지 대한민국 정치사는 평화적 정권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점, 민주계와의 당내투쟁에서 보여준 이회창씨의 권력의지 등도 이회창 대세론의 중요한 근거였습니다.

한편 이회창 대세론의 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회창씨 개인의 이미지는 신선하였지만 그가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는 세력이 군사정권의 주류였던 민정계라는 점이 그것이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과의 차별화 속에서 자신의 대세론을 유지해 왔지만 민주계와의 반목 역시 그에게는 잠재적인 불안 요인이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이회창 대세론은 화려했지만 그 이면에는 얼마든지 역공을 받을 수 있는 어두운 그림자가 잠복해 있었습니다.

후보선출 직후 이내 대세론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7월 25일 이회창 후보 아들들의 병역비리 의혹이 제기됐습니다. 당시 천용택 의원(국민회의)은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의 아들들이 애초 신체검사에서는 현역입영대상인 갑종판정을 받았으나 입영 연기신청 후 수년이 지나 입대할 당시에는 체중미달로 징집면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이회창 대세론에 포문을 열었습니다.

대세론은 허망할 정도로 쉽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갤럽의 7월 31일 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는 김대중 후보에 다소 앞섰으나 그의 지지율은 27.8%로 폭락했습니다. 그러다 보름도 채 되지 않은 8월 13일 이회창 후보는 김대중 후보에게 26%대 28%로 역전을 허용하고 맙니다.

이때부터 대세론은 급속도로 소멸했고 이회창 후보는 이인제씨의 독자출마라는 잠복해있던 복병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여기에 DJP연합이라고 하는 판세의 변화, 그리고 IMF라고 하는 최악의 국란까지 맞물리며 오랜 기간 동안 국민들에게 회자되었던 이회창 대세론은 정반대로 이회창씨의 대선 패배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회창 대세론은 왜 이렇게 허약했던 것일까요? 대세론의 붕괴를 단순히 아들들의 병역비리 때문만이라고 해석해도 좋은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다고 봅니다. 2002년 또 다른 대세론의 탄생과 소멸을 정리해 본 후 이 문제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2002년, 이인제 대세론의 탄생과 붕괴

2002년 대선에서도 이회창 대세론은 맹위를 떨쳤지만, 이회창 대세론의 탄생과 붕괴는 노무현 바람의 탄생과 위기 그리고 부활이라는 흐름의 종속변수에 그쳤습니다. 노무현 후보의 탄생과 더불어 이회창 대세론은 수그러들었고, 노 후보가 위기를 겪을 때 슬그머니 살아났으며, 후보단일화를 통해 노후보가 부활했을 때 대세론은 다시 자취를 감췄습니다. 한마디로 2002년 대선은 노무현 후보를 상수로 해서 치러진 선거였습니다.

2002년 대선의 대세론에서 교훈을 얻으려면 이회창 대세론보다는 이인제 대세론을 살펴보는 것이 낫습니다. 새천년민주당의 창당과 함께 구여권에서 신여권으로 옮겨온 이인제씨가 어떻게 대세론을 구가했는지, 그 대세론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살펴보아야 오늘의 현실에 일정 정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이인제씨는 당내에서 대세론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인제씨는 1997년 대선 직후 새롭게 창당한 새천년민주당에 합류하면서부터 유력한 차기 대통령후보로 거론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지위는 김대중 대통령 집권 기간 내내 유지되었습니다. 1997년 대선에서 얻은 500만 표가 그의 큰 무기였으며,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도운 숨은 공로자라는 세간의 인식이 그가 당내에서 대세론을 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이었습니다.

정치적 뿌리가 다른 그가 김대중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새천년민주당에서 착근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일부의 회의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이인제씨는 대통령 후보 경선이 치러지기 직전까지도 대세론을 구가했습니다. 동교동계의 지원에 힘입어 이인제씨는 당내 대세론을 굳게 지켰고, 본선 경쟁력과는 별개로 이 대세론은 꺾이지 않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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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인제 후보에게는 풀지 못한 큰 숙제가 있었습니다. 민주당과 개혁세력 지지층에게 이회창 후보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지 못했습니다. 또한 경선 불복이라는 전과(?) 역시 그의 근본적 한계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여론 지지도가 높던 이인제씨였지만 그의 대세론엔 한나라당을 이길 수 없다는 뚜렷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한편 새천년민주당은 한국 정치사상 최초로 국민경선제를 도입했습니다. 2001년 12월 5일의 일이었습니다. 2002년 3월 9일 제주를 시작으로 진행된 국민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은 노무현 후보였습니다. 노무현 후보는 3월 10일 울산에서 1위를 한 다음, 3월 16일 광주에서 연거푸 1위를 기록했습니다.

이른바 노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광주에서 이인제 후보가 혹은 한화갑 후보가 1위를 차지했더라도 이런 바람이 불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보긴 힘들 것 같습니다. 광주가 영남출신의 노무현 후보를 선택한 것은 모든 국민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고 이것이 노풍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광주의 선택은 노풍을 만들었고 그 노풍은 이인제 대세론은 물론이고, 여진을 일으키며 막강한 위세를 자랑하던 이회창 대세론마저 무너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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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론, 그 허약함에 대하여

앞에서 저는 워렌 버핏의 가치 투자론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워렌 버핏은 투자자들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한 기업의 가치란 그 기업의 제품 값과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외형적 기업의 평가만으로 그 기업에 투자해 엄청난 돈을 잃을 수도 있다." 또한 그는 시장이 항상 옳다고 믿지도 말 것이며, 주식시장에 떠도는 예측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투자처를 엄밀히 따져본 자신의 판단에 따르라고 충고합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잠재적 가치'에 투자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대세론은 '묻지 마식 동반투자'처럼 위험하고 위약한 것입니다.

지금 치러지고 있는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선에서도 대세론의 위험성은 쉽게 입증됩니다. 충청지역의 일개 지역구에서 쏟아져 나온 몰표 때문에 '손학규 대세론'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로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대세론의 허약한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손학규 대세론'이 타격을 입으며 그 반동으로 '정동영 역대세론'이라는 말이 떠돌고 있지만 이 역시 내용 없는 거품 주가 현상이 되기 쉽습니다.

일반적으로 대세론이 위기에 빠졌을 때의 정신적 공황은 대세론 붕괴를 가속시켰습니다.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 논쟁이 일어납니다. 이인제씨가 그랬고 이회창씨도 그랬습니다. 대세론에 바람이 빠지면 예외 없이 다(2002년의 이인제씨도, 1997년의 이회창씨도) 청와대와 대통령의 개입설과 음모설을 제기했습니다.

국민은 가치투자 방식으로 후보를 선택한다

과거의 실례로 봤을 때 대세론의 붕괴는 여러 요인에 의해 나타납니다. 드러나지 않던 약점이 대중의 공분을 일으켜 이뤄지기도 하고, 제3의 인물이 대중의 각광을 받음에 따라 그 여파로 대세론 붕괴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일 뿐 실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순식간에 붕괴하는 대세론이란 애초부터 허장성세였다고 보는 편이 옳습니다. 구경꾼으로 전락한 유권자를 속이려는 정치집단의 상징 조작 놀음이 대세론입니다.

국민들은 무지몽매한 구경꾼이 아닙니다. 이는 1997년에 DJP로 승기를 잡은 김대중 대통령, 그리고 2002년에 노-정 단일화로 역전에 성공한 노무현 대통령의 예를 통해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각각 내세운 비전과 그 비전을 뒷받침하는 삶의 이력이 유권자들에게 신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후보는 IMF환란을 준비된 대통령인 자신이 가장 잘 해결해 낼 수 있다는 것을 국민에게 호소했습니다. 이에 국민들은 김대중 후보가 걸어온 정치 인생을 검토하여 이것이 믿을만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에게 신임을 보냈습니다.

2002년의 노무현 후보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지역주의에 기반한 구태정치를 끝내고 새 정치를 열겠다는 비전을 국민에게 제시했고, 그 역시 살아온 정치역정에 기반한 평가에 의해 국민의 신임을 획득했습니다. 워렌 버핏 식으로 말하자면 이들 두 사람은 국민들의 가치투자를 이끌어 낸 잠재력을 지닌 우량 기업이었던 셈입니다.

대세론으로 사람들을 줄 세우고 그 허장성세를 기반으로 더 큰 세력을 만들어 대통령이 될 수는 없어 보입니다. 여론 조사는 이런 허장성세, 장터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확인하는 절차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유권자들은 자신의 한 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진실에 기초하고 진심에 기초하고 후보자와 그 정치세력의 살아온 이력이 보증하는 정책과 비전만이 대통령 본선을 통과해서 승리를 얻게 합니다.

대세론이란 이름은 사실 수준 낮은 정치문화의 대표적 개념입니다. 우리의 민주주의,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 역량이 대세론에 입각한 '묻지 마'식 투자 수준은 이제 벗어났다고 저는 믿습니다.

덧붙이는 글 | 안희정 기자는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임집행위원장입니다. 이 글은 안희정씨의 블로그(http://blog.naver.com/steel0225)에 함께 게재됐습니다.


덧붙이는 글 안희정 기자는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임집행위원장입니다. 이 글은 안희정씨의 블로그(http://blog.naver.com/steel0225)에 함께 게재됐습니다.
#대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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