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명절을 앞두고 선물 고르는 손길이 분주하다. 사진은 지난해 추석을 앞둔 서울 명동의 한 백화점 선물세트 매장.
오마이뉴스 김시연
택배회사에서 집으로 직접 배달되는 것이야 '수신거부' 형식을 빌어 돌려보내면 그만이지만, 아파트 경비실에 맡겨둔 것은 직접 되돌려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학생의 주소를 일일이 확인하고 찾아가 똑같은 방식으로 경비실에 맡겨놓고 돌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주소가 아파트가 아닌 일반 주택의 경우에는 무척 난감합니다. 집배원이 아닌 다음에야 번지수로 집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작년에는 경찰의 도움으로 주소를 확인해 반송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힘든 것은 선물을 돌려주며 '양해'를 구하기 위해 학부모에게 전화나 편지를 하는 일입니다. 선물을 돌려받는 입장에서 보면 속상하다 못해 매우 불쾌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애걸하듯 받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봐야 '진심'을 받아주는 경우는 여전히 많지 않은 듯합니다.
저도, 아내도 '교사'와 관련된 선물은 그 어떤 것도 받지 않습니다. 학생이든, 학부모든 선물을 주는 사람과 제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입장에 있다면, 애초에 선물이라는 개념이 성립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담임으로서 학급 학생과 학부모로부터 선물을 받는다면, 그 안에는 '다른 아이들에 견주어 조금 더 신경 써 달라'는 의미가 담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모든 선물을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얼마 전 이태 전 졸업한 제자와 그의 아버지로부터 값진 술 한 병 받은 적이 있고, 지난해 졸업식을 마치고 어느 학부모로부터 꽃다발과 함께 주유 상품권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적어도 그 아이에게 더 이상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자유로운' 입장으로 여겼기 때문에 별 거리낌이 없었으며, 외려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여기고 고맙게 받았습니다.
이런 고지식해 보이는 '원칙' 때문에 저도, 아내도 귀찮고 피곤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중학교 때 제가 받아야 했던, 또 견뎌야 했던 (앞서 말한) '스트레스'가 그것입니다. 누군가가 선생님이 고마워서, 진정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선물을 한다고 해도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줄 수밖에는 없습니다.
'남들 다 하는데 나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 주는 사람의 기쁨과 받는 분에 대한 고마움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저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는 '무난한' 선택이며, 어느새 거스르기에는 찝찝한 관행이 되고 맙니다.
관행이라는 게 다 나쁜 것은 아닐 테지만, 잘못된 것일지라도 일단 굳어진 관행은 깨뜨리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는 관행을 깨는 것이 바로 역사의 발전이고 진보라며 말하기까지 합니다.
선물을 주는, 아니 줘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관행을 거부하기 어렵습니다. 곧 조금이라도 오해와 불신의 소지가 있는 선물이라면, 받는 사람 쪽에서 거부할 수 있어야 비로소 관행에 균열을 낼 수 있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주니까 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백년하청일 뿐입니다.
오늘 아침 출근해서 메일을 열어보니 작년에 졸업한 아이 세 명과 학부모 두 분의 편지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운동장에서 함께 축구를 했던 작년이 그립다는 추억 얘기와 추석 잘 보내라는 단순한 안부 편지일 뿐이었지만, 한참 시간이 흘렀어도 저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고마웠습니다.
비록 종이 위에 펜으로 눌러 쓴 것은 아니지만, 그 편지들에는 굴비 세트나 사과 상자, 상품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정성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와 행복을 나누어야 할 명절은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지만, 선물에 담겨야 할 정성과 마음은 점점 관행화되어가는 듯해 그저 아쉬울 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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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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