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마을 앞 들판.
안병기
옛 부하의 밀고로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된 전봉준 장군은 1895년 3월 29일에 손화중 등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짐으로써 다시는 이 고택으로 되돌아오지 못한다. 대신 그는 이 옹색한 고택 대신 역사라는 커다랗고 영원한 집에 둥지를 틀었다. 우리의 정신 속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푸르고 싱싱한 녹두꽃으로 다시 피어났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만 고택을 나선다. 되돌아나오는 길에 동네 초입에 있는 공동우물을 들여다 본다. 땅 위로 석단의 돌을 쌓은 데다 뚜껑도 아주 무겁다. 그 당시에 이렇게 돌을 쌓았을 리도 없고 뚜껑을 덮었을 리도 없을 것이다. 이 우물은 도에 너무 거창하게 복원된 것이 틀림 없다.
마을을 걸어나오면서 들판을 바라본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농토란 없으면 없어서 서럽고, 있으면 가렴주구의 대상이 되어 서러운 골칫덩어리였을 것이다. 저 들판은 그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사색의 원천이 되었으리라.
저 들판을 바라보며 봉기를 꿈꾸고 어떻게 조직을 꾸릴 것인가를 구상했을 것이다. 어쩌다 말목장터에서 열리는 5일장에라도 가게 되면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에 대해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너는 어떤 계책으로 탐관을 제거하려고 하였느냐?
_별도로 계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심의 간절한 바가 안민에 있으므로 탐학을 본즉 분탄을 이기지 못해 이 일을 하였다. - 서기 1895년 2월 11일 제2차 신문 공초그는 제2차 신문 공초에서 말하길 별도로 계책이 있어 동학혁명을 일으킨 게 아니라 공분 때문이었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1968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에서 발견되었다는 사발통문의 존재는 이 진술을 뒤엎고 있다.
사발통문이란 사발을 엎어놓은 둥근 원 주위에 전봉준을 포함한 20명의 서명자 명단을 한자와 한글로 쓴 연통문을 말한다. 주모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도록 이름을 차례대로 써넣지 않고 둥근 원의 형태로 써 넣은 것이다. 만약 이 사발통문이 사실이라면 전봉준은 동학혁명의 첫 단계인 고부 봉기 때부터 상당히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사발통문은 아직도 '진짜냐, 가짜냐'라는 논쟁에 휘말려 있다. 어쨌든 내 다음 행선지는 사발통문 발견지와 동학혁명 모의탑이 있는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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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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