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나팔꽃 전설 - 2

등록 2007.09.16 13:30수정 2007.09.16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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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군장이 성민들을 보호하여 성으로 돌아왔다. 가을걷이에 접어든 성민들의 얼굴이 박꽃처럼 환하게 펴졌다. 푸근하게 퍼지는 나팔의 가락에 맞춰 흥얼거리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일할 때 어울려 부르는 노래는 대부분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팔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군장의 예리한 눈이 나팔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나팔은 언제나 유용하였으나 저것에 이끌리는 것은 아주 흔쾌하지 못했다.

 

젊고 강건한 군장은 자신을 위시하여 목숨을 걸고 성을 지키는 군졸들이 한갓 나팔에 따라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팔보다는 기운차고 웅장한 북이 쓰여야만 했다. 그러나 북도 그들처럼 나팔의 명령을 따르는 신세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자들을 위압할 음량과 박력을 가진 북이 천한 놈이 부는 나팔의 아래에 있다는 것은 결코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부친에게 물려받은 군장의 직위가 몇 대(代)나 산꼭대기에 틀어박혔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나팔수 따위에게 휘둘릴 수는 없었다.


"저희들을 위해 고초가 많으십니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군장이 흠칫 상념에서 깨어났다. 입성이 그리 시원치 않은 늙은 여인이 공손히 허리를 조아린 것이 보였다. 여인의 옆에는 딸로 짐작되는 처자가 함께 허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사는 형편은 어떤가?"
"돌보시는 덕택에 연명은 하고 있습니다."
"이번 추수가 끝나면 양식을 보낼 테니 그것으로 겨울을 나도록 하여라,"
"아아, 군장 어르신의 자비를 어찌 감당하리까?"


방아깨비처럼 연신 허리를 굽히며 사례하는 여인은 전사한 군졸의 계집이었다. 3년 전의 이맘 때 벌어진 이웃 성과의 싸움은 몹시 위태로웠다. 하마터면 군장이었던 그의 부친까지 칼을 맞아 죽을 뻔했을 정도였다. 적의 군장이 내찌른 창을 맞은 것은 저 여인의 사내였다. 그 군졸이 몸으로 막아선 덕택에 위기를 모면한 군장은 적장을 베고 겨우 싸움을 비길 수 있었다. 워낙 험했던 싸움이라 여러 곳에 상처를 입은 부친은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부친은 죽기 전에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군졸의 희생을 잊지 말 것을 당부했으며 군장을 물려받은 그에 의해 충실히 지켜지고 있었다.


"황감하오나 청이 하나 있습니다."


여인의 얼굴은 몹시 애절했다. 감히 청이 있다고 하였을 때는 그만한 연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 군장이 부장(副長)에게 군졸을 딸려 보냈다. 


"무엇이냐? 나는 그리 여가가 많지 않다,"


발길을 잡힌 군장의 음성에 짜증이 배나왔다.


"저 아이를 종으로 데려가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여인이 옆에 선 딸을 가리켰다.


"쇤네야 살날이 머지않았지만 어린 저것이 무슨 힘이 있어 홀로 여염에서 버티겠습니까? 제가 죽고 나면 왈짜들의 등쌀에 견뎌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즉 군장께서 굽어 살피시어 종으로나마 데려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아직 어려도 농사와 집안 살림을 모르는 것이 없는데다 손이 야물어 이미 베틀을 만질 알 정도입니다. 밥값은 충분히 해낼 것인즉......"
"종은 충분하여 굳이 더 들일 필요는 없다, 지금처럼 주리지 않을 정도로 곡식을 내릴 터이니 그것으로 호구하면서 건실한 사위를 보도록 해라."


빠르게 대답한 군장이 말고삐를 잡아채자 여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제 딸년의 인물을 보시고 말하십시오!"


여인이 조아린 딸의 머리칼을 잡아채다시피 하여 고개를 들렸다. 대수롭지 않게 바라보던 군장의 눈이 크게 흡뜨였다. 눈을 감은 채 그를 향하는 얼굴은 사람의 것 같지 않았다. 군장은 한동안이나 멍하게 바라보았다.


"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진달래라 하옵니다."
"나이는?"
"올해 열여섯이 되옵니다."

 

진달래의 입술이 열릴 때마다 은빛 진주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남루한 입성 대신 비단으로 치장하고 분단장을 하였으면 경국지색(傾國之色)이 부럽지 않을 자색이었다.


"그동안 바깥출입을 시키지 않아 깨끗한데다 지난 보름에 달거리를 시작하였으니 마음에 드실 것입니다."


여인의 의도는 분명했다. 천하에 맞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딸을 바치는 대가는 결코 적지 않을 터였다. 잠시 후 군장은 자신이 부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절대 다른 계집을 탐하지 않겠다며 부인에게 했던 맹세와 근엄해야 할 군장의 신분이 마음에 걸렸다. 

 

"쇤네의 딸이 군장 나으리의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성주님 댁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성주님의 장남이 무척 여색을 밝힌다하니......"
"누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하였는가!"


군장이 품에 손을 넣어 은장식의 비수를 꺼내 던졌다. 한 눈에 보기에도 매우 값나가는 비수는 약조의 증표로 손색이 없었다. 여인이 빠른 몸짓으로 비수를 집어 들어 품속에 갈무리했다. 

 

아침을 마쳤을 무렵 나직하게 내리 깔리듯 나팔이 불었다. 은밀하게 속삭이는 것 같은 나팔 소리는 성벽 밖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일어날 때를 알린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울린 나팔에 성민들이 불안해했지만 그동안의 경험이 있어 그리 당혹해하지는 않았다. 곧 성주와 군장이 달려올라 왔다.


"무슨 일이냐!"


말에서 뛰어내린 성주의 채근에 그가 성 밖을 가리켰다.


"저 곳의 새들이 여기저기에서 불안하게 날고 있습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성 밖의 전답과 맞닿은 야산이었다. 여기서 나고 자란 그의 눈에는 명확하게 보였지만 성주와 군장의 눈에는 그저 야산의 형체만 보일 뿐이었다. 군장이 발끈 노했다.  


"그게 뭐가 어쨌다는 말이냐! 새도 짐승이라 아침에 일어나 먹이를 구하기 위해 날아다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느냐? 겨우 그런 것 가지고 함부로 나팔을 불었으니 중죄(重罪) 면치 못할 것이다!"

"중죄를 면치 못할 자는 바로 네놈이로다!"


성주가 차갑게 말했다. 


"새들이 불안하게 움직이는 것은 둥지 아래 뭔가 위협적인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 곳에서 불규칙하게 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한 것이 많다는 이야기가 아니더냐?"


적이 여기까지 이동하여 매복한 것은 추수를 방해하기 위한 동시에 성민을 끌어가려는 의도였다. 예전의 피해에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는데 추수를 거두지 못하고 노동력까지 탈취당한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자칫했다가는 성이 위태로울 지경에까지 이를 확률이 컸다. 그런 피해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다른 성들이 사방에서 달려들면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었다.


"밤을 타고 이동한 적들이 저곳에 매복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군장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죽은 네 아비가 보았다면 한숨만 쉬겠구나!"


가차 없는 꾸짖음에 군장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어졌다.


"당장 나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군장이 크게 외쳤지만 이번에도 냉소가 돌아왔다. 성주가 군장을 데리고 내려갔다.

 

언제 적이 적이 쳐들어올지 몰랐기 때문에 나팔수는 아침을 먹지 못하고 자리를 지켰다. 성 밖으로 나가 있던 그의 시선이 흘긋 주변을 훑었다. 바로 앞의 약간 볼록하게 솟은 땅은 아비가 누운 곳이었다. 나팔수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지 못했다. 의무를 다하고 나팔을 전수한 그들은 자식들의 시야를 가리지 않기 위해 봉분을 쓰지 않고 평토(平土)로 생을 마감했다.

 

그 역시 죽게 되면 두자 남짓 깊이의 땅에 누여질 터였다. 그때까지 가장 높은 곳에서 나팔을 불어 때를 알리고 망보는 의무에 충실하면 그만이었다. 자신에게 부과된 의무를 이행하는 것에 지극히 만족하였으나 어미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렸다. 그가 열 살 무렵에 세상을 뜬 어미는 언제나 말이 없었다. 성주가 양식과 땔감을 풍족히 대주어 먹고살 걱정은 없었겠지만 여염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여기에 못 박힌 삶이 행복하기는 어려웠다.

 

어미는 늘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어쩌다 입이 열릴 때면 그쪽에서 누렸던 일상들이 처연하게 흘러나왔다. 나팔수의 아내로 선택된 그의 어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숙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았다. 그가 열 살 남짓 되어 스스로 밥을 해먹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미는 숨을 놓았다. 아비가 안고 나가는 어미의 시신에서는 아무런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덜렁대는 팔은 자유를 얻게 된 것에 기쁜 나머지 춤사위를 부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미는 죽어서도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 어미가 나팔수의 아내가 되기 전에 정인(情人)이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은 상당한 세월이 흐른 다음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성주가 보내는 여염의 계집을 취해 자식을 낳지 않기로 결심했다. 새로운 세대의 나팔수가 반드시 나팔수의 자식이어야만 한다는 법은 없었다. 아들을 얻지 못한 나팔수는 여염의 재능 있는 아이를 양자로 들여 전수하였으니 그 전례를 따르면 그만이었다.

 

식경(食頃)이 지나자 성문이 열렸다. 군졸들에게 보호된 성민들이 추수를 나갔다. 알곡을 실어올 달구지들이 한가롭게 삐꺽대었다. 저녁 무렵에 돌아올 때는 달구지에 실렸던 빈가마니가 맹꽁이처럼 통통하게 부풀어 있을 터였다. 그들이 전답에 닿아 일을 시작하려고 할 때 느닷없는 고함소리가 터졌다. 야산에 매복했던 적들이 일제히 뛰쳐나왔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기습을 당한 쪽이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군장의 호령에 군졸들이 좌우로 흩어지며 화살을 쏘았다. 농부로 위장한 군졸들이 달구지에 엄폐하여 화살을 퍼붓자 순식간에 여러 명이 말에서 떨어졌다. 기세등등하게 덤벼들던 적들이 주춤하는 순간, 성문이 벌컥 열리며 성주가 군졸을 이끌고 달려 나왔다. 오히려 기습을 당한 적들이 어쩔 줄 모르고 당황했다.


군장이 활을 당겨 쏘았다. 쏘는 화살마다 백발백중이었다. 군장이 칼을 뽑아들고 앞장서자 사기충천한 군졸들이 함성을 지르며 적에게 달려들었다. 잠깐 사이에 여럿을 벤 군장이 적의 군장과 맞닥뜨렸다.


"이놈!"


적장이 내찌르는 창을 몸을 비틀어 슬쩍 흘려버린 군장이 빠르게 칼을 내리쳤다. 팔뚝에 일격을 당한 적장이 이를 악물고 창을 고쳐 잡았다. 두 번째 찌르는 창을 덥석 움켜준 다음 잡아당기자 적장이 낚시에 걸린 고기처럼 끌려왔다. 군장의 칼이 급한 사선(斜線)을 그었다. 목이 반이나 잘린 적장이 피를 뿜으며 말에서 떨어졌다. 그것을 본 군졸들이 힘을 내어 덤벼들자 적들이 어지럽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군장이 추격하며 마구 베었다.


"그만! 그만해라!"


성주가 달려와 군장을 제지했다.


"왜 멈추게 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적을 죽이지 못하게 하느냔 말입니다!"


군장이 사납게 외쳤다. 피를 맛본 젊은 맹수가 포효하는 것 같았다. 


"이미 싸움은 끝났다! 필요 이상으로 죽일 필요는 없다!"      
"....."
"전쟁의 목적은 죽이기 위한 것에 있지 않다, 가급적 덜 죽이고 이기는 것이 전쟁의 본질이다."


군장을 타이른 성주가 싸움을 마무리했다. 이쪽의 전사자가 열 명 남짓인 것에 비해 사로잡은 적만 거의 백 명에 달했다. 포로는 바로 노동력이었으며 적에게 거둔 갑주와 무기 등의 전리품도 대단했다. 적을 크게 격파하여 설욕한 군졸들이 창검을 치켜들고 고함을 질렀다. 북이 크게 둥둥거리며 승전을 자축했다.

 

이번 싸움에서 군장이 보인 용맹은 실로 걸출했다. 군졸들이 적장의 수급을 베어든 군장을 둘러싸고 만세를 불렀다. 성주는 크게 다친 적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시신을 묻은 다음 이쪽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수습하여 돌아갔다. 포로와 전리품을 앞세우고 우렁찬 승전고를 받으며 돌아오는 군졸들이 저마다 용맹을 뽐냈다. 군장은 자신에게 쏠리는 계집들의 눈길을 은근히 즐기는 것 같았다.


"이번 싸움에서 일등의 공을 세운 자가 누구일 것 같으냐?"


성주의 말에 군장이 쑥스럽게 웃었다.


"그걸 어떻게 제 입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네가 세운 공은 훌륭했다. 그렇게 큰 공을 세웠으니 죽은 네 아비가 크게 기뻐할 것이다. 하지만 일등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일등이라는 말입니까!"
"나팔수다, 나팔수가 적의 매복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우리는 크게 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방을 두루 살펴 위험을 경계하는 것은 나팔수의 의무가 아닙니까? 그리고 나팔수는 안전한 곳에 있지 않았습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적과 싸워 민초를 보호하는 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다, 나팔수가 그곳에서 적을 발견한 것과 네가 적장을 베고 적을 물리친 것은 각자의 의무를 이행한 것이다. 저것을 보아라,"


성주가 비참하게 끌려오는 포로들을 가리켰다.


"나팔수가 아니었으면 네가 공을 세우기는커녕 저런 꼴이 되었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보았을 때 나팔수가 일등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성주가 나팔수를 일깨운 것은 굳이 군장의 공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앞으로 성의 기둥이 될 군장이 보다 넓고 공평한 안목을 가지게 되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군장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나팔수가 있는 곳을 노려보았다. 그것을 본 성주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날 저녁 그는 애절하게 나팔을 불었다. 싸움에서 죽은 자들의 넋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다. 아비는 특히 이 곡조를 잘 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것을 제대로 불지 못하면 원혼(冤魂)들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해코지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어떤 곡보다도 정성스레  불어내었다. 그것은 곧 이어 벌어질 축제의 기초이기도 했다. 모든 자들이 숙연하게 들었지만 단 한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군장에게 나팔 소리는 귀를 후비는 송곳 이상은 아니었다. 언젠가 나팔을 그놈의 목구멍에 쑤셔 박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2007.09.16 13:30ⓒ 2007 OhmyNews
#문학 #나팔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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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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