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총선17대 국회 개원 첫날인 지난 2004년 5월 31일, 당시 당대표인 권영길 의원이 다른 민주노동당 의원들과 함께 국회 본관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권박효원
고속도로나 국도에서 행정구역이 바뀔 때마다 매끄럽게 지역경찰들이 인수인계를 하면서 길안내를 했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1박할 때는 "테러 첩보가 들어왔다"면서 숙소 앞에서 경찰차 한 대가 밤새 대기하기도 했다.
수행단 입에서 "감옥가고 경찰하고 투닥거리는 게 일이었는데, 이렇게 경찰 보호 속에 잠을 자다니…"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수행 경찰은 4명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처음에는 이들의 경호를 거부했으나, 경찰의 끈질긴 요청을 받아들였다. '사찰'을 우려해 정보나 경비 쪽 출신자는 배제하고 수사파트에서만 받아들였다.
안면이 트인 뒤 수행 경찰들은 "우리도 경찰 내에서는 '빽' 없는 사람들이지만, 이회창 후보나 노무현 후보 쪽에 나가있는 (경호 경찰) 친구들한테 '너희도 후보하고 같은 상에서 밥 먹냐'고 한 마디씩 한다"고 했다. 이들도 자신들이 경호하는 후보가 바람을 일으키는 것에 힘이 나는 모습이었다.
"후보가 되는 과정에서 (운동진영) 어른들이 권 후보를 너무 홀대했다, 단체대표 정도로 대접하기도 했다"고 불만을 나타내곤 했던 수행비서들도 신바람이 났다.
'빨갱이들 주장'으로 치부되던 목소리가 수면 위로, 안방으로 올라왔다는 것만으로도 국민들에게 권영길과 민주노동당은 새롭게 느껴졌고, 가능성 있는 집단으로 여겨졌다.
당시 권 후보는 95만여표를 얻어 진보정당 운동의 숙원이었던 100만표에는 실패했지만, 이 때의 선전이 2년 뒤 총선에서 원내 10석 획득이라는 성과의 바탕이 됐음은 물론이다.
그 뒤 5년... 여건은 좋아졌지만 상황은 어렵다그로부터 5년이 지났다. 권 후보는 다시 대선 후보가 됐다. 1997년 국민승리 21에서 첫 출마한 이래 세 번째다.
상황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대선후보 TV토론 참가'를 따내는 것이 최대 전략이고 목표였던데 비해 이번에는 당내 경선 토론과 대선후보 선출대회도 공중파 방송과 인터넷 매체를 통해 생중계할 수 있었다.
3개월 연속 당비를 내는 당원만 5만명이 넘었고, 대선 예산도 구멍가게 수준을 벗어났으며, 권 대표의 인지도는 85% 수준이다. 권 후보가 "지지도 10%, 300만표에서 시작한다"고 장담하는 이유들이다.
그러나 하드웨어적 여건은 좋아졌지만 상황은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민주노동당은 바쁘기는 한 것 같은데, 뚜렷하게 이뤄낸 것은 없다는 비판이 많다. 총론 차원의 선언은 강하지만, 각론과 구체적인 정책대안은 약하다는 지적도 거세다. 또 뿌리깊은 정파구조와 대기업노조 중심이라는 비판 목소리도 여전하다.
총괄적으로 보면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의 중간지대에 있는 대통합민주신당과 참여정부, 민주당 등이 저렇게 지리멸렬의 극치를 달리고 있음에도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은 답보상태다. 실망한 중도세력은 이명박 후보 쪽으로 갈지언정 민주노동당 쪽으로는 발길을 돌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심상정 47%득표의 의미를 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