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전설 - 1

등록 2007.09.14 20:06수정 2007.09.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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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의 태양이 뜰 때 나팔이 울렸다. 태양이 뜨는 속도는 나팔의 운율과 일치했다. 싱그러운 안개와 찰진 바람 사이로 나팔 소리가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나팔의 상큼한 두드림에 성(城)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민초들의 집에서 아침 짓는 연기가 오르고 성벽을 지키던 군사들도 교대를 마쳤다. 일어나야 할 때와 쉴 때를 알려주고 급한 일이 일어나면 빠르게 경고하는 나팔은 농부의 쟁기만큼이나 중요한 도구였다.

 

그는 조용히 나팔을 불었다. 나팔을 불지 않으면 태양이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태양 뿐 아니라 하늘 아래의 모든 것이 정지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가슴 저 아래에 응축된 숨으로 마지막 가락을 뽑아 올린 그의 얼굴에 맑은 땀이 도랑처럼 흘렀다. 일 할 시간을 알린 그가 땀을 훔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언덕을 겨우 면한 야산이었지만 성과 밖을 모두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성과 밖을 구획하는 것은 세길 높이의 석벽(石壁)과 그 너머의 해자(垓字)였다. 농사를 짓거나 그물을 치려면 성문을 지나 해자 위에 설치된 좁은 다리를 건너야 했다. 소를 앞세우고 다리를 건너는 성민(城民)들을 본 그의 얼굴에 흡족한 웃음이 걸렸다. 그리 대수롭지 않아 보일지는 몰라도 또 하나의 의무를 완수한 것이었다. 손에 들린 나팔의 비중은 저 앞의 일출처럼 언제나 새롭고 강렬했다. 

 

잠시 후 북이 울렸다. 일정한 걸음처럼 또박또박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북소리는 군장(軍長)의 것이었다. 군졸들을 조련하기 위해 성 밖으로 나가는 군장의 모습이 보였다. 햇빛에 반사된 창검이 쏘가리의 비늘처럼 살벌하게 번득였다.

 

그의 얼굴에 걸렸던 웃음이 냇물에 씻긴 진흙처럼 급격히 사라졌다. 군장과 군졸은 반드시 필요했지만 북은 그렇지 않았다. 나무로 만든 납작한 원통에 쇠가죽을 씌워 만든 북이 생산하는 것은 고아한 음향과 그것을 이끄는 운율이 아니라 단말마로 끊기는 죽음의 박자였다.

 

북의 내면에 가득 찬 본질은 죽음이었다. 북을 칠 때마다 짙게 염색된 죽음의 분말이 불길한 박자를 따라 펄펄 날렸다. 우악스런 군졸이 힘껏 북을 치는 모습은 마치 살아 있는 소를 매질하는 것만 같았다. 텅텅대는 북소리는 매를 견디다 못한 소가 우엉 대며 울부짖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죽은 소의 가죽을 힘껏 내리쳐 소리를 만드는 북은 악기가 아니라 살육을 부추기는 도구일 뿐이었다.

 

얼굴을 찡그린 그가 나팔을 조심스레 감싸 안고 정좌했다. 납덩이를 삼킨 것처럼 가슴을 무겁게 가라앉히고 가만히 숨을 마셨다. 신선한 아침 공기를 가슴 그득 채워 순환시킨 다음 내뱉는 것을 반복했다. 들이마실 때는 서서히 간절하게 끌어당겼으며 내 쉴 때는 온몸을 비틀어 짜내듯이 밀어내었다. 들숨과 날숨이 반복될 때마다 몸이 깨끗해지는 것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 나팔은 오행(五行)으로 이루어진 악기다,
몇 해 전에 죽은 아비가 바람 속에서 말했다.
- 오행은 세상의 근본의 이루는 다섯 가지의 형태가 서로 어울려 새로운 것으로 변하는 것을 말한다,

아비는 술을 예로 들었다. 곡식이 술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했다. 곡식을 술밥으로 쪄내려면 솥에 물과 함께 담아 불을 때야 했다. 불은 나무에서 얻어지고 곡식은 땅에서 나는 것이니 그것들을 모두 합쳐 금(金), 수(水), 목(木), 화(火), 토(土)로 표현된다고 하였다.

 

각각의 요소들이 적절히 배합되고 버무려지거나 가열되면서 하나로 되는 것이 오행의 원리였다. 아비는 나팔이 제대로 익은 술이라면 북은 껍질도 벗기지 않은 거친 알곡을 담아낸 것과 진배가 없다고 단언했다. 단조로운 표현 밖에 가지지 못하여 용도가 제한되는 데다 아이들도 칠 수 있는 것이 무슨 악기냐며 경멸스럽게 말했다.  


- 우리의 나팔은 숨으로 연주한다. 숨은 누구나 쉴 수 있지만 나팔에 쓰는 숨은 전혀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 들숨과 날숨은 드나드는 방향만큼이나 달랐다. 들숨이 갈증을 벗겨내는 시원한 물이라면 날숨은 몸 밖으로 쏟아지는 오줌과 흡사했다. 

- 숨은 다르다, 숨을 왜 호흡(呼吸)으로 표현하는 줄 아느냐?
호(呼)는 뱉는 것이고 흡(吸)은 마시는 것이다. 아비는 호흡이 들숨보다 날숨을 앞에 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과 음식은 입구와 출구가 달랐지만 숨은 그렇지 않았다. 목구멍은 굴뚝의 역할을 겸하는 아궁이와 흡사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날숨에 정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다. 


- 날숨을 나팔에 불어넣어 음악을 만드는 것은 나무를 때 밥을 짓는 것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 우리가 나팔을 부는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밥을 짓과 완전히 똑같다.


나팔은 모든 사람들에게 유용해야 했다. 유용하다는 것은 다른 것과 달라야 한다는 말이 되었다. 아침에 사람을 깨우고 쉴 때를 알리는 것은 북이나 징으로도 충분했다. 나팔이 보기조차 역겨운 그것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용될 수는 없었다.

 

아침에는 부드럽게 불어주어 짜증나지 않게 일어날 수 있어야 했고 점심 무렵에는 빠르고 경쾌한 곡조로 나른함을 잊게 해주어야 했으며, 저녁에는 피곤을 덜어내는 은근한 곡조로 어루만져주어야 했다. 아비가 부는 나팔은 주변의 삶에 스르르 녹아들었다.

 

아비는 계절과 날씨에 따라 나팔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아침에 불어 깨우는 나팔도 봄과 가을이 달라야 했으며 비오는 날과 맑은 날도 틀려야 했다. 아비의 말대로라면 같은 곡조는 존재할 수 없었다. 실제로 아비는 그렇게 보여주었다. 아비가 부는 나팔은 주변의 삶에 스르르 녹아들어 그들과 함께 했다.

 

아비를 따라 나팔을 부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을 때, 나팔을 불어볼 수 없다는 것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나팔을 부는 아비는 절대 연습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팔을 부는 법과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방식은 언제나 말로 이루어질 뿐이었다. 아비가 그에게 허락한 것은 호흡과 가상의 나팔이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숨이 넘어가도록 연마한 호흡을 보이지 않는 나팔에 불어넣고는 손가락을 놀리고 날숨을 조절하는 연습을 무수히 반복했다.

 

몰래 한 번이라도 불어보았으면 죽어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았지만 아비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나팔을 불어볼 수는 없었다. 나중에는 미쳐 발광할 지경에까지 이르러도 아비는 나도 예전에 그랬었다며 무심히 넘길 뿐이었다. 이러다가는 아비가 죽어야 나팔을 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탄식하였는데, 그것은 현실로 이루어졌다.

그는 처음 나팔을 불게 된 그날을 잊지 못했다. 늦가을부터 눈에 띄게 기력이 약해진 아비가 마침내 자리에 눕게 된 것은 것은 몇 해 전의 겨울이 한참 깊어갈 무렵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오래 살 것 같지 않은 아비가 떨리는 손으로 나팔을 건네주더니 그것을 불라고 말했다.

 

그는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의 저녁 바람은 상상을 초월했다. 나팔이 손바닥에 그대로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처음 잡아본 나팔이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그토록 원했던 나팔을 불 기회를 맞았지만 그는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다. 자신의 나팔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와 그것도 나팔이라고 불었느냐며 몰매를 가할 것만 같았다.

 

가장 두려운 존재는 성주(城主)였다. 군장과 군졸들을 이끌고 달려온 성주가 칼을 뽑아 목을 칠 것 같은 두려움에 그 추운 겨울에도 진땀이 솟았다. 느닷없이 등짝에 매가 떨어졌다. 기겁한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아비였다. 지금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몰골의 아비가 형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나팔을 불지 못하겠느냐는 메마른 고함과 함께 두 번째 매질이 떨어졌을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나팔을 불었다. 입과 손가락이 알아서 움직여주는 것만 같았다. 입술에 달라붙은 나팔을 떼었을 때는 그만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진이 빠졌다. 첫 번째 연주를 무사히 마친 그를 흡족하게 바라보던 아비가 스르르 무너지던 광경은 죽어야 지워질 문신처럼 각인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인터넷한겨레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7.09.14 20:06ⓒ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인터넷한겨레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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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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