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초등 땐 이미 늦다고요?

조기 영어교육이 언어와 문화에 대한 편견을 조장할 수도

등록 2007.09.14 17:38수정 2007.09.1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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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집을 나서며 맨 처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현관문에 붙은 광고 전단 뭉치를 떼어내는 일입니다. 단 2~3일만에 폐지함을 가득 채울 만큼 마루 뿌려지는 그 ‘애물단지’ 중에서 치킨이나 피자 가게만큼이나 많은 게 바로 학원이나 유치원 광고지입니다.


‘비싼 돈 들여 미국에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곳이 바로 미국입니다.’
‘이 시대의 화두, 영어. 초등 땐 이미 늦습니다.’


어느 유치원 광고지에 적힌 문구입니다. 얼마 안 있어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내야 하는 예비 학부모인 저를 대놓고 ‘협박’하는 듯 느껴졌습니다. 읽기조차 부담스러운 선정적인 광고 문구에 그저 혀를 내두르며, 도대체 지금 우리에게 영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얼마 전 출근 길 아파트 승강기 안에서 일곱 살짜리 꼬마 아이와 이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유치원 가는 모양이구나?”
“네. 안녕하세요.”
“어느 유치원 다니니?”
“우리 유치원요? 리틀 아메리카요.”
“그렇구나. 그런데, 유치원 이름이 무슨 뜻인지 혹시 아니?”
“그럼요. 작은 미국. 우리 유치원이 젤 좋아요. 미국이 젤 크고 좋은 나라잖아요.”
“…….”

영어로 된 만화를 보고, 영어로 수업도 하고, 친구들과 영어로 퀴즈도 풀고, 한 달에 하루는 영어로만 말하는 날이 정해져 있다고도 했습니다. 언어는 모름지기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배도록 해야 효과적이라고 하니, 유치원에서의 영어 교육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우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영어를 언어라는 ‘도구’로만 여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승강기에서 만난 꼬마 아이의 경우에서 보듯이 영어를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용하는 ‘우수한’ 언어로 여기고, 심지어는 아이들이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 대한 동경을 갖게 되는 모습도 종종 눈에 띕니다.

듣자니까 원어민에게 과외로 영어를 배우는 초등학생이 적지 않고, 아예 학원들도 앞다퉈 강사로 원어민을 ‘모셔오는’ 경우가 보편적이라고 합니다. 수업을 시작할 때쯤 어떤 교육적 취지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이들이 서로 영어식 이름을 지어 부른다고 합니다.


영빈이가 ‘리차드’가 되고, 재훈이가 ‘캐빈’이 되며, 진아가 ‘제니’가 되어 서로 대화를 하고, 그 부여받은 이름이 자랑스러웠던지 아이들은 그 영어 이름을 ‘아이디’로 쓰며 다른 친구들에게 뽐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낯선 문화를 익힌다는 것이니 그 나름대로 의미는 있을 것이나, 어린 아이들에게는 자칫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의 위계조차 조장하는 꼴이 될 수 있어 조심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이곳이 미국’이라며 자랑스럽게 홍보하는 학원과 유치원의 광고 전단을 우리나라에 와 있는 미국인이 보면 뭐라고 생각할까요? 단지 영어를 잘 가르치는 곳이라는 의미의 문구일 테지만, 우리글을 어설프게 배운 그들의 눈에는 ‘글자 그대로’ 우리가 미국의 식민지라는 뜻으로 읽히지는 않을지.

초등학교를 지나 중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영어는 이미 ‘도구’를 넘어 ‘목적’이 되고, 대학을 지나 사회생활을 하게 될 때쯤에는 하나의 ‘종교’가 돼버렸습니다. 너댓살배기 아이부터 시작된 ‘초(超)조기교육’의 영향으로 앞으로는 그 인식이 빨라질 뿐더러 당연시될 게 뻔합니다.

학기에도 몇 번씩 실시되는 각종 기관의 경시대회 등으로 학생들이 느끼는 영어의 강박적 강도는 교과 편성 단위수를 넘어선 지 오래고, 단지 영어가 유창하다는 것이 다른 십수 가지 교과의 성적이 높은 것보다도 주위에 더 큰 부러움을 삽니다.

한때 ‘한 가지만 잘 해도 대학 간다’는 말이 유행했더랬습니다. 입시에 철저히 종속된 우리네 입시 현실을 무시한 ‘철딱서니 없는’ 대책으로 치부돼 버렸지만, 그 한 가지가 영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원어민처럼 능숙한 영어 회화 실력만 갖췄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대학 입시든 취직이든 몇 배, 몇 십 배 유리한 게 현실입니다.

제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도 영어 교육을 시작할 예정이랍니다. 아이들도 좋아하고(정확히 얘기하자면, 신기해 하고), 무엇보다도 학부모들의 요구가 들끓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다른 곳에서는 다 하는데 우리 아이만 안 시킬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옳든 그르든 따져보지도 않고 현실과 대세에 따라가려는 것이니 교육이 ‘정상적’으로 행해지기는 어려울 겁니다.

유치원 영어 교육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다보니 참으로 난감한 상황에 몰리게 됐습니다. 초등학교 때 영어를 시작하면 이미 늦다는 어처구니없는 광고 전단의 협박 정도는 그저 웃어넘길 수 있지만, 어찌 되었건 영어 수업을 받게 될 친한 친구들과 더 놀지 못하고 혼자 일찍 유치원을 나서야 하는 아이를 생각하면 못내 가슴 아프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아이가 몸으로 부대껴야 할 ‘배움’이 비단 영어만의 문제는 아닐 테지만, 우리 사회에서 미래를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문화 자본이라는 영어가 초, 중, 고등학교 울타리를 넘어 유치원, 아니 젖먹이 아이들조차 옥죄는 현실을 어떻게 넘어서야 할지 앞이 캄캄합니다.  부모 된 입장에서 남들 다 하는 대로 따라갈 수도, 그렇다고 눈 질끈 감고 현실에 맞설 수도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영어 회화 실력을 승진 점수에 반영하건 말건, 대학에서 모든 강의를 영어로 하건 말건, 학점보다 토익, 토플 점수가 더 중요하건 말건 지금 가슴에 크게 와 닿지는 않습니다.

다만, 조기 교육이 효과적이라는 둥, 이중 언어 생활이 다문화를 이해하는 데 보탬이 된다는 둥 말들 많지만, 이런 맹목적인 영어 열풍이 우리 말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부담과 고통을 넘어 언어와 문화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낳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울 따름입니다. 지금 그 징후가 이곳저곳에서 심심찮게 보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예비 학부모로서 조언을 부탁드리는 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예비 학부모로서 조언을 부탁드리는 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조기영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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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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