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말리기를 하면서 김장 배추 모종 심는 것이 요즘 과업이다. 할머니는 남들 받는 값만 달라고 하시는데 특별히 더 받아드릴 생각이다. 건조기에서 말린 것과 태양초 값이 똑같다면 말이 되는가.
조명자
다른 마을엔 탄저병이 돌아 중반기 이후부터 고추 따기를 포기하는 판이라는데 우리 마을은 다행히 병이 돌지 않아 집집마다 여분 물량이 200~300근 정도는 보통이라고 했다. 외지에서 들어 와 뒤늦게 마을 주민으로 편입한 내가 마을에 공헌을 하는 기회가 유일하게 마을 사람들이 지은 농산물 판매를 도와주는 일.
도시에 사는 지인들에게 참깨, 고추, 콩, 메주 등을 소개해 주면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 모두 득을 보게 된다. 특히 고추나 참깨는 묶은 거나 중국산을 섞어 파는 악덕 상인들 때문에 햇곡식을 구할 수 있는 직거래 형태가 아주 호평을 받고 있는 중이다.
작년만 하더라도 대도시에 살고 있는 친척과 친구들에게 참깨나 고추 그리고 콩 등의 농산물을 상당히 소개해 줘서 마을 할머니들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톡톡히 받았다. 그런데 올해는 예상보다 고추 작황이 좋았는지 작년에 부탁하지 않았던 아주머니들까지 찾아오기 시작했다.
맨 처음 찾아 온 이는 작년에도 고추농사를 잘 지었던 정읍댁. 우리 마을 아낙 중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아낙이다. 부지런하고 힘도 좋아 비닐하우스 농사는 농사대로, 논농사는 논농사대로 어찌나 농사를 잘 짓는지 대도시 직장인 못잖은 연간 소득을 올린다는 알부자다.
작년 가을에 고추 좀 팔아 달라기에 한 200여근 소개해 주었고 나중에 절인 김장 배추 서울판매까지 주선해 줬더니 고맙다고 수시로 먹을 것을 들고 오는 아낙이다.
"아짐, 자꾸 부탁만 하자니 염치가 없네요. 올해도 우리 고추 좀 팔아주세요."
"아, 그러지요, 뭐… 나도 아직 고추를 사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올해 고추 값은 얼만가?"
"지난 번 장에 7천 원 나갔다는데요. 아짐도 알다시피 우리 고추는 하우스에서 키워 농약도 아주 조금 쳐 정말로 좋당께요."
농작물 중에서도 고추만큼 농약을 많이 치는 작물도 드문데 농약을 덜 쳤다니 나부터 사겠다고 덜컥 약속을 했다. 그런데 고추를 팔아주려고 서울에 연락했더니 올해 고추가 풍작이라 고추 값이 5~6천원 밖에 안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 마을 어른들도 '좋은 놈이 6천 원'이라면서 서로 당신들 것 팔아 달라고 야단을 하셨다. 어련히 알아서 받을까 고추 값도 알아보지 않고 덜커덕 팔아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가부간에 답은 해야 할 터였다.
"서울에 연락을 했더니 올 고추 값이 싸다네요. 그래서 거기서 알아서 사라고 했어. 우선 내 것만 10근 부탁해."
그랬는데도 고추 값을 내릴 의향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서울 건 중국산을 섞어 믿을 게 못되는데 가격 탓만 한다고 하는데 그 앞에 "우리 동네도 그렇다더라" 초를 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