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사지 귀부보물 제489호로 지정된 영암사지 귀부. 코에는 서기(瑞氣)를 내뿜고 있으며, 귀갑 위로 꽃이 피어있고, 비신받침에는 두 마리 물고기를 새겨놓았다.
김성후
현재까지 알려진 영암사와 관련하여 가장 오래된 자료는 강원도 양양의 사림사(沙林寺) 홍각(弘覺)선사의 비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비문 또한 완전하게 남아있지 않고 일부만 존재하는데 그 기록을 보면 “(?)年 後於靈巖寺 修正婁月”라고 하여 “홍각선사는 영암사에서 몇 달 동안 선정을 닦았다”라는 기록이다.
홍각선사의 출생년도는 정확하지 않으나 17세에 출가하여 법랍 50년이 되던 해인 헌강왕 6년(880)에 입적했다고 하기에 역으로 출생년도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813년이 된다. 그럼 810년경에 출생하여 830년 전후에 출가한 뒤 840년 전후로 영암사에서 공부를 하지 않았나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9세기 중반 즉 850년 이전에 이미 영암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다음 영암사라는 직접적인 이름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경남 산청 지곡사(智谷寺) 진관(眞觀)선사의 비문에 보면 “선사는 918년 영암산 여흥선원(靈巖山 麗興禪院)에서 법원(法圓)대사를 친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여흥선원이 어디에 있는지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지만 옛날에는 절의 이름과 지명인 산의 이름을 같이 부르던 경우가 많으므로 영암산을 영암사라고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특히 지곡사와 영암사의 거리가 아주 가까우므로 이 상상이 그리 허황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어 앞에서 말한 적연국사 비문이 있고 그 다음으로 인동(仁同 , 현재 경북 칠곡)의 선봉사(僊鳳寺)의 대각국사비문이 있다. 대각국사 의천이 입적한 뒤 그의 부도를 선봉사에 모셨는데 그 부도비의 비문 음기(陰記)을 보면 영암고달(靈巖高達)이라는 글이 나온다. <역대고승비문>(이지관 역, 가산문화사)의 번역을 보면 “거돈사 원공국사의 신측(神則)과 영암사 적연국사의 고매(高邁)한 달경(達境)과 ~~”라고 되어있다.
이런 기록에 비추어볼 때 영암사는 최소한 850년 이전에 설립되어 있었으며 고려 초기까지 그 사세가 아주 번성한 절임을 알 수 있다. 영암사의 매력은 이렇게 크고 번성한 절이 언제 무슨 까닭으로 사라져버렸는지 그 기록이 없어 답사객을 혼돈에 빠뜨린다는 점이다. 결국 영암사의 멸망 또한 상상으로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영암사는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없어 그 이전에 폐사되었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추파 홍유(秋波泓宥, 1718-1774)라는 스님의 추파집(秋派集)에 “黃梅山 古英俊國師居 其下禁有靈巖寺舊墟(황매산 옛날 영준국사(적연국사의 諱)가 머물던 영암사 옛터가 그 아래 있는데...”라고 되어 있어 18세기 이전에 영암사는 폐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암사지가 보여주는 것들영암사지를 찾아 나서면 그 흔적만으로도 내가 잘못왔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가장 먼저 멀리 황매산 모산재의 화강암이 우리를 반겨준다. 붉은 색감을 가진 화강암에 검은 흔적은 마치 겸재 정선이 붓을 휘둘러 금강산을 묘사한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일단 산세에서 한 수 접어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