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9년 영의정에 증직된 교지: 후손인 김병식씨 소유
이상기
김숙자는 1419년(세종 1년) 문과에 급제하여 고령현감 등을 지냈다. 1456년 세조가 즉위하자 벼슬을 그만두고 처가인 밀양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런 연유로 김종직은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1446년(세종 28년) 소과에 응시했다 낙방한다. 이때 김종직은 시험관이 자신의 문재를 알아보지 못함을 한탄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리고 13년 후인 1459년(세조 4년)에야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선다.
김종직은 과거를 보러 밀양에서 한양으로 가면서 이곳 고령 고을을 거쳐 성주로 이어지는 현재 33번 국도를 따라갔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고령 현감을 지내 한때 고령에서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점필재의 후손들은 무오사화로 멸문지화를 당한 후 이곳 고령 땅으로 숨어들어 살게 되었던 것이다. 점필재는 예문관과 홍문관의 제학 등 예의와 문장을 다루는 부서의 책임자를 거쳐 1489년 형조판서와 지중추부사를 끝으로 벼슬을 마감한다.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 온 김종직은 1492년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6년 후인 1498년(戊午) 김종직의 제자들이 중심을 이룬 사림파는 유자광 등 훈구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귀양 가게 된다. 이때 김종직의 시신도 무덤에서 꺼내져 목이 잘리는 수난을 당한다. 그로 인해 김종직의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5대손이 이곳 개실 마을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