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사진] 한반도의 슬픈 소리. ⓒ 뿌리깊은나무
[오른쪽 사진] 뿌리깊은나무조선소리선집11. ⓒ 신나라레코드
이 음반 속에서 지게 어사용을 부른 분은 경남 밀양시 산내면 임고리 발례동에 살던 신의근이라는 분이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고향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예닐곱 살 적부터 동네 어른인 김홍준씨에게서 소리를 배웠다고 한다.
에이 억조창생 만민들아 이내 말쌈 들어보오내 날 적에 넘도 나고 넘 날 적에 나도 났네남과 같이 났건마는 에이어떤 사람 팔자 좋아고대광실 좋은 집에 부귀영화 살건마는이내 말자 무슨 죄로(이하생략)
- '지게 어사용' 일부 노래 중간마다 "얼씨구 이후후후" 하는 말을 후렴처럼 붙여가며 스스로 흥을 돋운다. 오랜만에 '지게 어사용'을 듣다 보니 어렸을 적 추억이 떠올랐다. 나도 어렸을 적 고향에서 살았을 적엔 나무꾼 노릇을 톡톡히 했던 사람이다.
나무꾼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내 고향은 광주광역시와 담양군의 경계에 있으니 깊은 산골은 아니다. 그래도 들머리만 조금 뻔히 터졌을 뿐 사방이 산으로 꽉 막힌 곳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학교에서 돌아오기가 무섭게 나무나 퇴비 만들 풀을 베러 산으로 가야 했다.
나의 어쭙잖은 지게꾼 노릇은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이어졌다. '도회지에서 학교 다닌답시고 방학 때 집에 와서 빈둥거리고 논다'라고 수군거릴 게 뻔한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늙으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일하시는데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 때문이다. 여름 방학 때는 퇴비로 썩힐 풀짐을 져내야 했고 겨울엔 땔감 나무를 해야 했다.
여럿이 산에 가서 같은 시간 동안 나무를 해도 내 나무 등짐은 늘 내 또래 다른 아이들 것보다 작았다. 낫질에 서툴렀기 때문이다. 나뭇짐 묶는 일도 다른 사람들보다 서툴렀으며 지게질도 다른 친구들처럼 야무지지 못했다.
비탈길을 엉금엉금 내려오다가 돌부리에 그만 지게 목발이 걸려서 지게를 진 채로 발라당 넘어지기가 일쑤였다. 그때마다 쓰러진 지게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나서 얼크러지고 찌그러진 등짐을 다시 묶어야 했다. 가끔가다가 거들어주는 친구도 없지 않았지만 그건 '가물에 콩 나듯'이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지게여
들판에는 아직 익어야 할 벼가 있는데
떠나간 집 담벼락에 기대어
너는 몸을 꺾고 쉬는구나 우리들 따뜻했던 등이여- 이상국 시 '지게' 전문(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창작과 비평사·1998 ))다른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나서 홀로 뒤처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찌나 마음이 초조했는지 바지에다 오줌이라도 지릴 지경이었다. 앞서 간 일행을 부지런히 뒤쫓아가지만 일행은 벌써 길 모퉁이를 돌아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마음 속에선 알 수 없는 초조감이 일고 난 또다시 걸음을 헛디뎌 넘어지고 만다.
눈 오는 날이나 산자락이 온통 눈으로 덮여 있을 적에도 나의 나무꾼 노릇엔 휴식이 없었다. 가내미 뒷산이나 안산으로 가서 빼빼 마른 소나무 삭정이로 한 동을 만들어 오거나 솔잎을 긁어 빵빵하게 '가리나무' 한 동을 만들어 내려와야 했다. 눈이 아주 많이 쌓여 있을 적엔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꽁꽁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생솔가지만으로 얼른 한 짐을 만들어 내려오기도 했다.
내려오는 눈길은 또 얼마나 미끄러웠던가. 끄떡하면 미끄러졌고 그때마다 엉덩방아를 찧곤 했다. 그렇게 서툰 나무꾼 노릇으로 겨울 방학 한철을 나면 손등은 새까맣게 때가 달라붙어 거북 등처럼 갈라지고 그 틈새에선 피가 찍찍 흐른다. 운이 나쁘면 귓바퀴에 얼음이 백이기도 했다.
그렇게 지게와 씨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내가 정작 나무꾼들이 지게 목발을 두드리며 부르는 신세타령 노래인 '어사용'을 알게 된 것은 서른 중반을 넘어서였다.
노동하는 삶이 가장 정직한 삶이다 지금은 그 어디에서도 쉽게 지게꾼을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부두가 하역 작업 같은 데서는 아직도 지게를 사용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마지막으로 지게꾼을 만난 때는 몇 년 전 속리산 등산길에서였다. 지게 위에는 해발 1054m 높이의 문장대에 있는 매점에 갖다줄 라면 몇 상자가 올려져 있었다.
거의 맨몸인데도 낑낑대며 산길을 올라가는 나의 숨소리는 거칠기 짝이 없었지만 그의 숨소리는 문장대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지게는 따로 분리된 도구가 아니라 자기 몸의 일부처럼 여겨졌다. 이 겨레가 생긴 이래 지게는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아무리 버거울지라도, 아무리 혹심한 눈보라일지라도 결코 내동댕이쳐버릴 수 없었던 겨레의 삶 그 자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