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태권도연맹 최중화 총재최중화 총재는 태권도 창시자인 고 최홍희 장군의 장남이다(2007년 8월 4일 영국 버밍엄에서).
윤형권
'태권도(跆拳道 ; TAEKWON-DO)'.
태권도는 1955년 4월 11일 최홍희(육군 제29사단 창설) 장군에 의해 만들어졌다. 전세계 태권도 인구는 170여개 국가에 7천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60억의 지구인에게 'KOREA'를 알리는 것으로 태권도 만큼 강한 것은 없다.
분명히 태권도는 한민족에게 큰 축복이다. 그러나 정작 태권도를 창시한 최홍희 장군과 그의 가족들은 군사독재정권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철저히 희생되었다.
1972년 최홍희 장군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폭압에 항거해 해외로 망명했다. 뜻있는 태권도인들은 "태권도 창시자와 몇 명의 사범들만 망명한 게 아니라 진짜 태권도가 함께 망명한 것"라고 말한다.
'진짜 태권도'가 대한민국에 없는 틈을 타서 1973년 '가짜 태권도'가 급조되었다.
이 '가짜 태권도'가 군사독재정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의기양양할 때 태권도 창시자인 최홍희 장군과 그의 가족들은 온갖 탄압과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진짜 태권도'를 세계 구석구석에 전파했다. 그 결과 3800만 명이나 되는 '진짜 태권도' 가족이 생겼다.
박정희 정권이 만든 가짜 태권도, 북한까지 간 '진짜 태권도' 태권도 창시자인 최홍희 장군의 뒤를 이어 국제태권도연맹을 이끌고 있는 최중화(55 · 캐나다 토론토) 총재를 지난 8월 5일 제14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가 열린 영국 버밍엄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태권도 창시자이자 아버지인 고 최홍희 장군에 대한 이야기와 최 총재가 연루된 전두환 전 대통령 암살모의 사건 등에 대해 단독으로 알린다.
- 태권도 창시자이면서 아버지인 고 최홍희 장군은 어떤 분이셨나?"아버님께서는'태권도'라는 목적을 갖고 태어난 분이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영어 학교에 다녔는데, 나를 보시면 항상 'You are my son(sun) (너는 내 아들(태양)이다'라고 하셨다. 아버님이 'You are…' 하시면 나는 'my son!'이라고 대답하면서 자랐다. 그런데 내가 조금 커서 우리말을 알아들을 때 쯤 아버님께서는 'You are my son'에서 son이 무슨 의미인 줄 아느냐?' 물으셨다. 아버님은 'son'은 태양이라는 sun을 의미한다. Sun이 의미하는 것은 태권도를 이어갈 사람이라는 뜻이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지금도 하늘에서 태권도를 가르치실 것이다."
- 북한에 태권도를 전해주게 된 동기는? "아버님은 누가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 하는 것에 연연한 분이 아니시다. 오로지 태권도만 하셨다. 정치를 모르는 분이셨다. 정치와 이념과 사상도 초월한 분이었다. 군대에서도 출세의 기회도 잡지 않으시고 명예를 지켰다.
1972년 세미나를 간다고 하시고는 가족들은 서울에 남겨 두고 사범 몇 명만을 데리고 망명하셨다. 가족보다는 태권도가 우선이라는 생각을 갖고 계신 분이었기 때문에 어머님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나중에 아버님께서는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에 못 이겨 태권도를 위한 선택한 길이었다고 말씀하셨다.
아버님께서는 공산국가인 헝가리나 폴란드와 같은 동유럽에도 태권도를 보급하셨다. 아버님께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셨고 민족을 우선했다. 항상 말씀하시기를 '세계 각국에 태권도를 가르치는데, 불쌍한 우리 민족에게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하시면서 북한에도 태권도를 전해주셨다.
아버님은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분이었기 앞뒤 생각 없이 (태권도 보급을 위해) 북에 가셨다. 세계 각국에서 태권도 사범을 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혹독한 방해로 남한에서 사범을 데려 올 수도 없었다. 아버님께서는 '태권도 지도자는 한민족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계셨다.
또한 북에 계신 큰 아버님과 고모가 보고 싶어서 북에 가신 것이다. 하지만 그 후 남한 정부가 이렇게 차디차게 할 줄은 몰랐다. 아버님은 태권도로 남과 북이 통일해야 한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북에 가셨는데 왜 이런 아버님을 친북인사라고 매도하며 비난하는가? 한국정부는 아버님을 북한으로 몰아넣고는 왜 이북에 갔냐고 탄압했다."
"캐나다에서 만난 '광주'... 약한 자를 보호하는 게 태권도 정신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왜 암살하려 했는가?"1980년 당시 나는 27살의 피끓는 청년이었다. 토론토에서 있을 때였는데 한국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서 TV를 보았다. 총칼로 무장한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 나라를 지키라고 국민들이 만들어준 그 총과 탱크로 연약한 시민들을 학살했다. 이것을 보고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인이라는 것이 캐나다 친구들에게 부끄러웠다.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면 광주로 뛰어들어 시민들과 함께 했을 것이다. 망명한 가족으로서 조국으로 갈 수도 없어서 캐나다에 있는 한국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했다. 태권도 정신은 강한자의 폭력으로부터 약한 자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전두환 군부의 광주시민 학살만행을 1980년 12월이 될 때까지 TV와 신문을 통해서 그리고 한국에서 온 사람들로부터 들었다. 이 때 기회가 된다면 광주시민의 학살 원흉인 전두환을 없애버려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이러한 결심을 아버님께 말씀드렸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은 안 된다'며 반대하셨다.
전두환씨를 암살하려던 계획에 참여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명감을 갖고 시작했다. 전두환씨는 선량한 수천 명의 광주시민을 죽이고 정권을 잡지 않았나?
1980년대 초부터 토론토의 집근처에 살고 있는 유태계 마피아를 알게 됐고, 친구 사이로 지냈다. 1982년 경 어느 날 전두환에 대한 적개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 친구가 찾아와 '내가 전두환을 없애려고 하는데 자금을 대줄 사람이 있다'며 통역을 해달라고 말했다.
비엔나에 갔다. 처음엔 북한사람인지 남한사람인지 몰랐다. 통역을 하면서 전두환 암살계획에 깊숙하게 개입됐다. 오직 전두환씨만 없애버리면 된다는 생각으로 앞뒤 가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필리핀의 어느 골프장에서 쏘려고 했다. 내가 직접 총을 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유태인 마피아가 현장에서 전두환씨를 사살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중에 캐나다 경찰이 이 사실을 알게 돼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 뒤에도 두 차례 더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암살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후 집에 있는데, 캐나다 경찰로부터 전두환씨가 캐나다를 방문하니 잠시 해외로 나갔다가 왔으면 좋겠다고 해서 동유럽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마침 태권도 교재도 만들어야 했으므로 북한에 가 있었다. 북한에서 약 2년간 생활을 하고 난 후 헝가리와 폴란드 등에서 몇 년을 보내다가 아버님께서 캐나다 법정에서 심판을 받자고 말씀하셨다.
캐나다 온타리오 법정에서 징역 6년을 받았고 모범수로 1년 정도 복역하다가 출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