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보다 빨리 눕고, 먼저 일어나는 '풀'

감동케 하고, 더러는 고통스럽게 하고...

등록 2007.09.02 15:01수정 2007.09.02 18:5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풀이 눕는다. / 비가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 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 다시 누웠다. /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 발목까지 / 발밑까지 눕는다. / 바람보다도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의 시 '풀'이다. 어린 나이에 이 시를 접하고 그 안에 들불처럼 거침없이 타오르는 민중적 삶에 감동했던 기억이 너무 새롭다.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 그것만으로도 우리를 덮고 있는 잿빛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우리들의 나태와 혼돈을 채찍질하기에 충분했다.

 

그 시가 '참여시'냐 혹은 '운율과 회화를 위한 무의미의 시'인지에 대한 논란은 관심의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그때까지의 생각을 반전시키는 소재의 역발상과 강약이 도드라진 멋들어진 표현, 어쩐지 우리에게 정의로운 힘을 불어넣는 듯하다. 역동적인 들풀의 형용. 그것이 우리를 환호작약케 하는 것이었다. 나중 김수영에 관한 시평을 읽고 다른 시각에서 이 시를 보는 이들이 있음을 알았지만 그것은 내게 있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풀이, 들풀이 주는 이런 환청과 같은 이미지는 지금까지 언제나 한결같은 것이었다. 강고한 고집불통, 끈질긴 생명력, 완전한 해방구로서의 충일감. 그런 것들의 복합적인 설정으로서 바람에 날리는 들풀은 나를 이끌어주는 전사이곤 했다.

 

그러다가 이장한 어머니의 산소를 매개로 하여 또 다른 풀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징하게도 끈질긴 생명력으로 나를 절망케 한 풀들의 여름잔치였다. 지난 3월 생전에 드린 약속대로 어머니를 양지바른 산자락으로 다시 모셨다. 묘소를 돌아보며 약속을 지켰다는 기쁨은 잠시였을 뿐, 봄부터 피어나는 이름모를 들꽃과 풀들은 주말의 휴식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달개비, 명아주, 고사리, 쇠비름, 돌나물, 개망초, 쑥, 며느리밑씻개, 꿀풀, 환삼덩굴, 바랭이, 그리고 칡. 무슨 중공군의 인해전술도 아니고, 그처럼 많은 식물들이 하늘을 향해 머리를 내밀 줄은 정말 몰랐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솟구치는 풀들 앞에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1주일이 지나고 나면 다시 그들의 차지가 되는 묘소를 보며 어머니와 원망 섞인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어머니, 뭣허고 계시오. 사람 없는 저녁이면 가만가만 나와 이 풀들도 좀 뽑고 동생 고추밭도 좀 매고 그러시오."

 

그러나 어머니는 한 말씀도 없으셨고, 땡볕보다도 강렬한 여름식물들은 수그러들기는커녕 더욱 기세를 높였다. 지난 7월 어느 주일을 건너뛰어 찾았더니 묘소 앞으로 개간하여 마련한 작은 고추밭은 키 큰 풀들에 포위되어 있었고, 호박과 수박나무는 이미 풀들과 환삼덩굴에 치여 숨을 헐떡였다.

 

풀들 위로는 비웃기라도 하는 양 큰 얼굴의 칡잎이 너울거렸다. 밭을 일구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묘소 주변만을 가꾸기로 했다. 그리고 장마가 오기 전 '잔디는 살리고 잡풀은 죽인다'는 농약을 살포했다. 그러나 잔디와 섞여있던 바랭이는 죽지 않고 오히려 더 무성해졌다. 바랭이는 밑부분이 지면으로 뻗고 마디에서 뿌리가 내려 사방으로 생명을 키워가는 밭에서 흔히 자라는 잡초다.

 

바랭이를 뽑기 시작했다. 아내와 둘이서 8월 염천 아래 한나절을 소비하고도 반도 뽑지 못했다. 다시 날을 잡아 동생 부부와 넷이서 또 한나절을 보내고서야 모두 뽑을 수 있었다. 몸은 녹초가 되었건만 뿌리까지 모두 없앨 수는 없어 다시 이놈들이 성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밭을 점령한 명아주는 이제 어른 키보다 더 크게 자라 바람이라도 불면 불만을 토로하는 시위대인 양 웅성거리기까지 한다.

 

돌이켜보면 세상사에는 반드시 그 이면이 있게 마련이다. 풀들만 해도 그렇다. 김수영의 시로부터 얻었던 세상 바꾸기의 그 강렬한 참여적 이미지 건너에는 끊임없는 괴롭힘의 이미지 또한 담겨 있었던 것이다. 생각하건대 모든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에도 제각각의 이면이 있는 것 같다. 요사이 지면을 장식하는 주가의 급락과 반등, 정치권의 성공과 실패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은 더 깊어진다.

 

오르막이 있으면 반드시 내리막이 있는 법. 또한 오르막에도 힘듦과 건강을 향한 소망이 양분되어 있고 내리막에도 관절의 고통과 경사를 내려가는 편함이 숨어있다. 이것이 자연의 철칙인 것을 그 뉘라서 부정할 것인가. 특별히 정치하는 이들, 혹은 나라와 지역의 살림을 하는 이들은 꼭 자신이 하는 일들의 이면을 꼼꼼히 들여다보았으면 좋겠다. 풀들이 내게 준 교훈이었다.


바랭이가 죽죽 뻗고 고사리가 드문드문 서있던 어머니의 자리가 말끔히 단장된 모습이 너무 좋다. 산을 오르내리며 이름 모를 들꽃을 들여다보고 그 형용에 감탄하던 아내의 마음이 지금은 어떨까. 목덜미를 적시는 땀에 젖어 평소 자기가 좋아했던 풀꽃을 뽑아내며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 여름이 이제 끝자락에 도달했습니다. 언제까지 갈 것 같은 염천도 시들해지고, 조석으로 찬 바람이 목덜미를 스칩니다. 곧 추석이 오겠네요. 이맘때 가장 그리운 사람이 가족이지 싶습니다. 그리고 부모이지 싶습니다.

2007.09.02 15:01ⓒ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여름이 이제 끝자락에 도달했습니다. 언제까지 갈 것 같은 염천도 시들해지고, 조석으로 찬 바람이 목덜미를 스칩니다. 곧 추석이 오겠네요. 이맘때 가장 그리운 사람이 가족이지 싶습니다. 그리고 부모이지 싶습니다.
#풀 #들풀 #성묘 #추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2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쌍방울 김성태에 직접 물은 재판장  "진술 모순"
  3. 3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컴퓨터공학부에 입학해서 제일 많이 들은 말
  4. 4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5. 5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