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량특집 - Part 4

등록 2007.08.31 12:09수정 2007.08.31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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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악물고 내달리던 그가 마침내 벼랑골에 닿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잠시 숨을 가다듬는데 저 앞에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이 보였다. 그것은 눈부시게 하얗고 거대한 짐승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그는 도끼를 꽉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다가들었다. 그 짐승은 처녀설(處女雪)처럼 눈부신 순백색의 거대한 말이었다. 절대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짐승이 아니었다. 그러나 놀라기에는 아직 일렀다. 말의 잔등에는 커다란 한 쌍의 날개가 있었고 그것을 부채질 하듯 한가롭게 흔들고 있지 않은가?

"설마 저, 것이 요, 용마龍馬?"

그가 꼿꼿이 얼어붙었다. 두 다리가 의지와는 상관없이 덜덜 떨렸다. 그러나 용마는 그런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 그저 조심스럽게 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기는 용마의 그늘 속에서 자고 있었다. 용마는 부드럽게 날개를 흔들어 날벌레들을 쫓아 주는 것이었다. 그제야 말발굽의 비밀이 풀렸지만 그는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다.

"내 아들! 제발 내 아들을 돌려줘!"

거품을 문 그가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들자 용마가 그에게 머리를 돌렸다. 용마의 눈동자는 너무나 고요했다. 바람마저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는 용마를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기를 위해서 좋을 것 같았다. 저렇게 훌륭한 짐승을 관아가 왜 핍박하는지 알 수 없었고 고발을 하지 않으면 대죄大罪로 다스린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진실이겠지만-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그와 아내뿐이니 비밀 유지는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아내는 미쳐있었지만 부부간의 신뢰가 깨진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과실이었다. 미친 아내를 마을의 약전 노인에게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그 때까지 어린 아기를 돌보는 것이었다. 그가 흘긋 용마를 바라보았다. 아기와 용마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용마는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용마가 부르르 떨면서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용마의 갈기가 빳빳이 일어서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급작스런 변화에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내일 것으로 생각한 그가 머리를 돌리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나타났다.

"아니? 여기까지 웬 일이시오이까?"

뒤에 있는 사람은 약전 노인이었다.

"허허허! 내가오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다는 게냐?"

하기는 약초를 취급하는 노인이 그것을 캐러 다니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고 산이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다. 걸망이 묵직한 것을 보니 상당한 수확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흐음... 역시!"
"저게 말씀하시던 용마라는 것이더이까?"
"그렇다."
"그러시면 관아에 고발을 하실 생각이신지요?"
"그럴 생각은 없느니라."
"아! 그러시다면 매우 잘 된 일입니다. 일단 저의 집으로 가셔서 거친 수수밥이나마 드시지요."

그런 중에도 용마와 노인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전혀 비현실적인 현실에 어쩔 줄 모르던 그가 노인에게 다가갔다.

"제 안사람이 실성을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어르신께 데리고 가려던 참이었는데 여기서 만나 뵈니 이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진맥을 보아서 병근病根을 뽑아주신다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나이다. 돌려받은 산삼을 다시 드릴 것이며 앞으로 캐어내는 산삼은 무조건 다 드리도록..."
"그럴 필요 없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오니까?"

노인이 대답 대신 걸망에 손을 집어넣어 뭔가 묵직해 보이는 물체를 꺼내들더니 그에게 집어던졌다. 시뻘겋고 더부룩한 긴 터럭에 쌓인 그 물체가 땅에 떨어져 구르다가 정확히 그의 발 앞에서 멈추었다.

"으아악! 이, 이것은?"

피에 뒤엉킨 머리카락 사이로 생기 잃은 두 눈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아내의 머리였다. 아내는 무엇 때문에 목이 잘려 노인의 걸망에서 나오는가? 그토록 자상한 노인께서 이처럼 처참한 살변殺變을 저지르다니...그만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게 노인을 쳐다보는 그는 이제 어떤 것을 보아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천마天馬! 정말 반갑다!"

노인이 다가들자 용마가 훌쩍 날아올랐다. 커다란 날개를 퍼덕이며 허공을 밟는 듯 나는 용마의 움직임은 독수리 같은 맹금猛禽들의 몸놀림과는 전혀 달랐다. 용마는 허공에서 노인의 진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어두울 때 다른 곳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정도로 내가 속을 줄 알았느냐?"

서서히 앞으로 다가드는 노인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그의 몸에서 자애스런 부분이 빠져나가고 극히 사악한 것이 그 자리를 채운 것 같았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그가 엉금엉금 기다시피 아들에게 다가갔다. 기저귀만 찬 아기는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그는 아기를 꼭 안았다. 어린 자식을 어떻게든 보호해야만 했으며 그러려면 저 노인에게서 벗어나서야 가능할 것이다. 그는 지금 머리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는 용마를 믿었다.

"여보게나. 우리들은 그동안 좋은 주인과 손님이었었지?"
"대, 대체 무슨 짓을 하시려고?"

노인의 두 손이 걸망으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살벌하게 번득이는 것을 가득 움켜쥐었다. 노인은 날카로운 기합을 터뜨리면서 그에게 덮쳐들었다.

"죽어라 정도령!"

허공에서 떠 있던 용마가 어느 틈에 노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용마와 정면으로 부딪친 노인이 저만큼 튕겨졌다. 노인이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용마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용마가 내리 밟을 때마다 땅이 한 자나 파여 나갔고 노인은 이리저리 몸을 굴려 겨우 피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 만에 노인의 비명이 터졌다. 용마의 발에 짓이겨진 노인의 왼팔이 깨끗이 잘려나갔다. 노인은 결사적으로 몸을 굴렸지만 거대한 바위에 막혀버렸다.

겨우 몸을 일으킨 노인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용마가 달려들었다. 앞발을 번쩍 든 용마가 노인의 머리를 겨누고 내리찍자 아기를 안은 그가 머리를 돌렸다. 아주 단단한 것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울린 다음 갑자기 잠잠해졌다. 용마와 노인은 자욱한 먼지에 가려 있었다. 바람이 불어 먼지가 휘날리자 그들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용마의 발굽은 바위에 깊숙이 박혀있었다. 노인의 머리는 발굽에서 불과 한 치도 떨어지지 않았다. 노인이 몸을 틀어 빠져 나오는데도 용마는 움직임이 없었다.

"하하하! 네가 인간의 속임수를 당할 것 같으냐?"

노인이 득의에 찬 광소를 터뜨리며 뛰어나가자 용마도 바위에 박힌 발굽을 빼내더니 다시 날아올랐다. 그러나 용마는 어딘가를 크게 다친 것 같이 몸놀림이 심상치 않았다. 그것을 설명하기라도 하듯 노인은 남은 오른 손을 서서히 들어 보였다. 노인의 손에 들린 부지깽이만한 허연 나무꼬챙이 같은 것이 승패를 결정지은 것 같았다.

"천마! 이것은 승천하려다가 낙뢰落雷를 맞은 이무기의 뼈로 만든 검이다. 네 몸은 인간의 쇠붙이로는 어쩔 수 없겠지만 같은 종족의 뼈라면 능히 뚫어 낼 수 있을 테지."

비통하게 울부짖는 용마의 아랫배에서 붉은 선혈이 쏟아져 내렸다. 그 핏줄기는 공기와 닿자 미세한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내가 왜 팔을 날린 줄 아느냐? 애초부터 이것을 꺼내들면 네가 근접할 리가 만무하지. 그래서 네가 완전히 근접할 때까지 숨긴 것이다. 물론 내 고육책苦肉策이 아주 잘 먹혀들었지."

아기의 위를 맴도는 용마의 날개 짓이 눈에 띄게 힘이 빠졌다. 노인은 그런 용마를 처연하게 바라보다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만 돌아가거라! 더 이상 겨뤄봐야 네게는 승산이 없다."

용마의 형체가 서서히 흐릿하게 옅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용마는 비통한 울음을 남기고 아득한 허공으로 스러졌다.

"아, 안 돼!"

용마를 물리친 노인이 다가들자 그가 아기를 안고 무작정 내달렸다.

"으헛!"

하마터면 벼랑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제야 여기가 바닥을 알 수 없는 벼랑골이며 자신이 벼랑 쪽으로 달렸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미욱한 놈! 겨우 달아난다는 곳이 고작 벼랑이냐? 하기는 정도령과 함께 죽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구나."
"정도령이라니? 그게 대체 누구더이까?"
"바로 네 놈의 품에서 자고 있는 놈이다."
"소인 놈은 아직 자식의 이름도 짓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름도 변변치 않은 제 놈의 집안을 어찌 정씨라고 하시오이까? 제 아비 이전부터 정씨는커녕 아무런 성도 가지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아시지..."
"불쌍한 놈!"

하나 뿐인 팔과 거기에 잡힌 이무기의 뼈를 제외하면 다시 예전의 노인으로 되돌아 간 것 같았다. 노인은 자애스러움과 안타까움이 혼재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서서히 다가왔다.

"그만!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
"대체 왜 이러시온지요?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러시는 겝니까! 안사람을 죽인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핏덩이의 숨통까지 끊으려 하시오이까?"
"물론 너는 아무런 죄가 없다. 정도령이 네 집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지."
"정도령이 대체 누구라는 말이오니까?"
"긴 말 필요 없다! 당장 그 놈을 내 놓거라!"

노인의 눈에 다시 단호한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 서슬에 질린 그가 물러서자 벼랑이 뒤꿈치에 선뜻하게 느껴졌다. 노인이 더 이상 다가오지 않자 그는 아기를 꼭 안고 벌벌 떨었다.

"그 놈이 아직도 네 자식이라고 믿고 있느냐?"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르신이 목을 자른 아낙이 내 가시버시가 아니더이까? 이 산 속에 누가 또 있어 애가 선다는 말이오니까? 우리에게서 태어난 자식이며 당연히 내 아들이오이다! 누가 그런 헛소리를 믿기나 한답디까? "

왜 여기에 용마가 나타나고 아내가 목이 잘리며 자애스런 노인이 저토록 흉악하게 변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더구나 그런 일들의 끝자락에 아기의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기는 여전히 쌔근쌔근 잘 자고 있었고 그것이 더 한층 가슴을 에었다. 그가 서러운 울음을 터뜨리자 노인은 실컷 울게 내버려두었다.

"좋다. 그놈이 네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 입증되면 어찌할 테냐?"
"얼마든지 말해보십시오! 그러면 내 손으로 아기를 바치리다!"
"그렇다면 그놈의 겨드랑이를 만져보거라."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아기의 겨드랑이를 더듬었다. 겨드랑이에 대체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어억!"

당연히 아무것도 없어야 할 겨드랑이에서 뭔가가 잡혔다.

"똑바로 보거라. 그것이 대체 무엇이더냐?"

아기의 팔을 들어 올리자 뭔가 작은 것이 움찔거렸다. 그는 자신의 눈에 비친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한겨레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터넷한겨레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용마 #노인 #정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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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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