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할머니 석상(2004년 5월)삼송동 도화공원에 있을 당시 모습
박상진
왜적들은 할머니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더는 갈증을 견디기 어려웠던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투어 물을 마시고 끌고 왔던 말에게도 물을 먹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후 이 물을 마신 왜적들은 다들 배탈이 나서 배를 움켜잡고 쓰러져 고통스러워 오만상을 다 찡그렸다.
밥할머니로부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부총병 사대수는 이때를 놓칠세라 군사들을 독려하며 친히 선두에서 삼지창(三枝槍)을 들고 적을 찔러 공중에 던지면서 진군의 북을 치게 하니 적들은 추풍납엽(秋風落葉)처럼 공중에 날아가고 북소리가 땅을 흔들어서 혈로(血路)가 스스로 뚫리게 되었으며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서 돌아갈 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는 모두가 밥할머니의 머리에서 나온 전략으로 남편인 할아버지와 미리 짜고 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왜적이 물러가자 할머니는 쉴 사이도 없이 도원수 권율(權慄)이 이끄는 조선군이 적과 싸우기 위해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인근 마을의 싸울 수 있는 젊은 남녀를 모두 거느리고 남편과 함께 행주산성으로 들어갔다. 벽제관 전투가 끝난 지 겨우 2주 밖에 되지 않은 2월 12일, 행주산성(幸州山城)을 향해 진격해오는 왜적을 상대로 남자들은 관군(官軍)을 도와 활을 쏘며 싸웠고, 여인들은 밥할머니의 통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행주치마로 돌을 나르고 솥에 물을 끊이기도 하였으며, 부상병을 치료하는가 하면 주먹밥을 만들어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또한 평소에 불심(佛心)이 두터웠던 밥할머니는 많은 돈을 북한산 사찰에 희사(喜捨)하였으므로 주위로부터 ‘보살할머니’로도 불렸다고 한다.
이후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때는 이미 80세의 고령이었는데, 아들 문천립(文天立)을 시켜 많은 군량미를 내놓는다.
왕은 문천립의 공을 잊지 못해 그에게 종2품인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위계(位階)를 내리고, 불광동(佛光洞)에 3일 갈이의 땅을 하사했다고 한다. 또 별도로 성을 이씨로, 본관을 완산(完山)으로 바꾸게 하였다고 <남평문씨 충양공파보(南平文氏忠襄公派譜)>에 기록되어 있다. 즉 종실(宗室)인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사성(賜姓)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