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 왠지 불안하다

[일본 소설 맛보기 4] 온다 리쿠의 <유지니아>

등록 2007.08.24 13:39수정 2007.08.24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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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출판 비채
막바지 더위가 한창일 때 이 책을 만났다. 온다 리쿠의 최신작 <유지니아>. 해가 쨍쨍 내리쬐는 날씨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한바탕 비를 퍼부어대고 그러다가는 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뜨거운 열을 내뿜는 최근의 날씨 속에서 이 책을 만난 것은 그나마 행운이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이 '미칠듯한' 날씨 속에 위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유지니아>의 배경 또한 이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열기와 알 수 없는 끈끈함과 습함, 그 속에 알 수 없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사건은 호쿠리쿠 지방 K시의 '아오사와'라는 한 명가 저택에서 잔칫날 벌어진 대량 독살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열일곱 명의 희생자를 낸 이 끔찍한 현장에서 이 집의 외동딸인 '히사코'만이 유일하게 살아남는다. 누군가로부터 전해진 독극물이 든 맥주와 주스를 마신 사람은 모두 죽고(가정부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남긴 하지만) 유일한 생존자였던 히사코만이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히사코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녀는 앞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소설의 전개도 다소 환상적이고 모호하게 진행된다. 대개 추리소설은 어떤 한 사건이 있은 뒤 그 후 이것을 추리하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전개하는 형식이다. 그에 반해 <유지니아>는 신원을 알 수 없는 한 화자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한다. 읽다 보면 사건의 대략적인 밑그림이 그려지고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대강 감을 잡을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명쾌한 작품은 아니다. 어쩌면 읽는 사람에게 약간의 인내를 필요로 하는 시작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이 중간부에 이르면 페이지를 넘기는 손길에는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독살사건의 관련자들...그러나 그들의 증언은 전부 달랐다

요는 이렇다. 20년 전에 발생했던 독살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나'는 그 당시 사건과 관련이 있던 사람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한다. 그러나 이보다 10여년쯤 앞서, 그 사건 당시 어린 꼬마였던 '마키'라는 인물이 대학생이 되어 졸업논문을 발표하기 위해 그 사건을 취재한 기록이 있다. 그 취재물은 <잊혀진 축제>라는 소설로 발표되어 당시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끝내 진범은 밝혀내지 못했다.

이제 노인이 되었거나 그 사건을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나'에게 그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그들의 증언은 조금씩 다르고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크게 어긋나지는 않지만 약간씩 각이 달라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퍼즐처럼. 그것의 존재는 사람의 신경을 괜스레 건드린다.


당시 독극물을 배달했던 남자가 자살함으로써 경찰에서는 범인의 자살로 사건을 마무리하려했지만 진범은 따로 있다는 설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사건은 '잊혀진' 것이 아닌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사건이 되고 만다. '나'는 마침내 '아오사와' 저택의 존폐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에서 귀국한 '히사코'를 마주하게 된다. '나'는 그전까지 한번도 히사코를 본적이 없다.

다만 여러 사람들의 증언과 <잊혀진 축제>에서 서술된 대로 '섬뜩한 아름다움'과 신비한 분위기를 지닌 소녀로만 생각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미 중년의 부인이 되어버린 '히사코'를 처음 만난 '나'는 당황하게 된다. 내가 본 히사코는 그들이 말한 그 히사코가 아니었던 것이었다.


범인을 밝히는 것,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소설은 '사건의 진상은 무엇이고 범인은 누구였더라'라고 명쾌하게 끝을 내는 작품이 아니다. 모든 것이 다 흐릿하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독극물 사건으로부터 30년을 지나오고 있지만 화자가 말하는 시점은 항상 여름이다. 그것도 곧 소나기가 내릴듯한 후덥지근하고 끈끈한 기후의 여름.

한바탕 소나기가 내리면 세상은 온통 물로 흐려져 제 빛깔을 잃게 되듯이 진실도 그렇게 흐려지고 만다.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진실'이라는 것은 때론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있는 명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사실이라는 게 뭘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저마다 사실이라고 생각하면서 말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을 본 그대로 이야기한다는 건 쉽지 않아요. 아니, 불가능합니다. 선입견이 작용한다든지, 잘못 봤다든지, 잘못 기억한다든지 하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다 조금씩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안다는 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p.57)

<유지니아>는 분명 추리소설이다. 그러나 명쾌하고 분명한 추리소설의 공식에 길든 독자들에게 이 책은 굉장히 짜증스럽고 싱거운 작품이 될 수도 있다. 제아무리 미궁에 빠진 사건이라도 추리해가고 정리하다 보면 그 윤곽이 대충 드러나고 분명해지게 마련인데 이 책은 어떻게 된 노릇인지 읽을수록 혼란스럽고 모호하다.

작품 초반에 용의자가 너무 싱겁게 드러나긴 하지만 이것도 일종의 트릭이다. 읽을수록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렇다면 도대체 범인은 누구란 말인가? 어쩌면 작가 자신도 모를지도 모른다.

추리소설 전형적 공식에서 약간은 비켜난 작품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말이 있다. 어떤 사건이나 사물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그 공포의 정체는 '불안'이다. 어느 한 사건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것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약간씩 어긋나고 예상을 비켜간다고 생각했을 때 느끼는 공포는 더 아리송하고 혼돈스럽다.

마치, 곧 몰아닥칠 소나기를 예견하는 듯 먹구름이 시나브로 하늘을 까맣게 뒤덮었을 때 느끼는 심정과 비슷하달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유독 그런 날씨가 자주 연출되었다. 막바지 더위, 열대야로 잠 못 이루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번 읽어볼 것을 권한다. 끔찍하거나 잔인한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은근한 공포가 주는 매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유지니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비채, 2007


#온다 리쿠 #유지니아 #일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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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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