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번 수결이정근
"우리가 밤을 새운 것이 여러 날 이지요?"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방원 야인시절 하륜의 천거로 이숙번과 처음 만난 후, 왕업을 이루기 위하여 수많은 밤을 새우던 일을 떠올리는 질문이다. 태종은 이숙번에게 또 한 차례 술을 쳐주었다. 역시 술잔에 보름달이 떠있다.
"나들이를 떠난다면서요?"
"송구스럽습니다. 몸이 찌쁘뜨 하여 온천에나 다녀올까 합니다."
며칠 전, 태종에게 일급 첩보가 접수되었다. 이숙번이 갑사 이징옥과 군사 몇 명을 대동하고 백천 온천에 나들이를 준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괘씸했다. 신하가 군사를 대동하고 다닌다는 것도 불쾌했지만 따라 다니는 장수들도 한심스러웠다. 태종 이방원이 가장 싫어하는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것이다. 태종은 평소 붕당을 짓고 사병을 거느리는 것을 금기사항으로 생각했다.
"누구랑 떠나는 게요?"
"시종 몇 명과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올까 합니다."
이숙번은 실수하고 있었다. 임금은 신하를 상대로 속내를 내보이지 않으면서 진실게임을 하고 있는데 이숙번은 그걸 몰랐다. 술잔에 떠오르는 보름달처럼 환하게 속내를 보여줬어야 했는데 그러하지 못했다. 이숙번이 나라의 정예군 갑사(甲士) 이징옥과 군사들을 시종쯤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대단한 도발이었지만 태종은 애써 충격을 감추며 냉정을 잃지 않았다.
"안성군이 벌써 온천에 다닐 나이가 되었소?"
"불혹을 넘겼습니다."
이 때 이숙번 나이 마흔 셋이었다.
"하하하, 그래요. 난 아직 어린아이처럼 보이는데…."
"황공하옵니다."
또다시 이숙번의 빈 잔에 술을 쳐주었다. 이때까지 태종은 한 잔의 술도 마시지 않았다.
마지막 기회를 놓친 이숙번
"벌써부터 온천엘 찾아다니는 부원군에게 좋은 약재를 하나 내려 주리다. 소합유라고 아주 귀한 약재요."
"황공무지로소이다."
태종은 의약방에 명하여 버리려던 소합유를 가져오게 하여 이숙번에게 주었다. 이튿날 예궐한 이숙번이 임금을 배알했다.
"전일에 내려 주신 약은 매우 좋았습니다."
태종은 이숙번이 가소로웠다. 변질되어 벌레가 생긴 약을 먹고 좋았다니 가증스러웠다. 소합유 사건으로 귀양간 유사눌을 이숙번이 슬그머니 비호한 것 같았다. 곤장을 쳐 귀양 보낸 처사를 비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태종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이숙번이 온천에 다녀온 후 임금의 의중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큰 죄를 지은 것 같아 병을 핑계 삼아 입궁하지 않고 근신하고 있는 동안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이숙번을 향하여 날아오고 있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