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보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 중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51명을 7개의 무덤에 합장한 신미순의총.김종성
위와 같이 미군은 신미양요의 세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 조선군은 단 한 차례도 전투에서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미군이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미국이 아니었다. 조선이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전쟁에서는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신미양요가 조선의 승리였다고 기술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미국이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전쟁에서는 패배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미국이 당초 얻고자 했던 목표를 끝내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 해병대 틸톤 대위가 말한 바와 같이 "조약 체결을 위한 미국의 조선 원정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무위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미국은 한성에 가까운 연해에서 함포사격으로 위협을 가하면 조선정부가 금방이라도 항복을 해올 줄로 믿었다. 무력위협을 통해 1844년에 청나라를 개방시키고 1854년에 일본을 개방시킨 적이 있기에, 미국은 그 정도의 위협만 가하면 조선이라는 나라를 식은 죽 먹기로 개항시킬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 차례의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뒤에도 조선정부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청나라나 일본 같으면 항복을 해왔을 텐데, 흥선대원군이 이끄는 조선정부는 항복은커녕 도리어 대외강경책만 강화할 뿐이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조선은 백기를 든 게 아니라 척화비만 들었을 뿐이다. 미국의 당초 전략은 그렇게 해서 빗나가고 말았다.
결국 미국은 조선 개방이라는 당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철수했고, 그처럼 전쟁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미국이 패전했다고 하는 것이다. 미군이 6월 12일 오전에 철수하였기 때문에 강화해협에 걸린 성조기도 금방 뽑혀지고 말았을 것이다.
미국이 조선과 국교를 체결한 것은 그로부터 11년 뒤인 1882년의 일이었다. 이 해에 미국·영국·독일 등은 청나라의 중재에 힘입어 함포사격이 아닌 평화적 방법으로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군사적 방법이 아닌 외교적 방법을 채택하고 나서야 비로소 미국은 조선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고조선·고구려·고려시대 대외전쟁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19세기말의 조선 역시 신흥 강국에 맞서 끝까지 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조선·고구려·고려처럼 당대 최강국을 상대로 한 대결은 아니었지만, 조선은 미국이라는 2위권 서양 강국의 지위를 쉽게 인정하지 않고 최후까지 버티다가 결국 미국을 돌려보내는 데에 성공하였다.
물론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면, 미국이 대규모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한성을 점령하고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국·러시아라는 양대 최강이 주시하고 있는데다가 청나라·일본이라는 이해관계국이 대치하고 있는 복잡한 구도 하에서 미국이 조선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이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미국으로서는 그 뒷감당을 할 만한 국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함포사격으로 위협을 가하고 군사력으로 조선을 제압해보았지만, 조선은 미국의 기대대로 끝내 항복을 하지 않았다. 위협을 가해도 항복을 하지 않으니 미국은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남북전쟁 이래 처음으로 외국 땅에 성조기를 꽂았다면서 기분이 '업'되었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뿐이었다. 성조기는 강화 땅에서 곧 내려지고 말았다.
위와 같이 한민족 국가들은 신흥 세계최강 혹은 강국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대항하다가 때로는 이익도 보고 때로는 손실도 보았다. 이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특이한 측면이다. 땅도 좁고 인구도 상대적으로 적고 생산물도 얼마 되지 않는 한민족 영토에서 이 같은 저항력이 나온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민족이 신흥 세계최강에게 끝까지 굴복하지 않을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가지 국제정치적 혹은 지정학적 요인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나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기지 않는다'는 한민족 특유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이 험악한 인상을 지으면서 "문 열라!"고 하면 목숨 걸고 대항하고, 남이 온화한 인상을 지으면서 다가오면 기꺼이 받아주는 특유의 '손님' 대접법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민족의 경우에는 신흥 세계최강이 무력으로 위협을 가하면 대개의 경우 꼬리를 내리고 새로운 세계질서에 신속히 순응했지만, 한민족만큼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때로는 승리를 얻기도 하고 또 때로는 멸망을 당하기도 했다.
새로운 국제질서를 빨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민족의 기질은 어찌 보면 국제사회에서 낙오되는 지름길일 수도 있다. 중국이나 일본처럼 세계 최강 앞에서는 일단 머리를 숙이는 민족들이 더 많은 부와 영예를 누릴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굶을 때 굶더라도 또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자존심만큼은 지킨다는 한민족의 특유한 기질을 반드시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기질이 아니었다면, 한민족이 이 좁고 척박한 한반도에서 수천 년간 정체성을 지키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상들은 그렇게 살았는데 오늘날의 한민족은 어떠한가? 구한말 시대의 조상들더러 무능하다고 욕하지만, 신미양요의 사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구한말의 한민족은 비록 군사력은 약했어도 자존심만큼은 끝까지 지키려 했다. 그리고 강화도에 꽂힌 성조기도 며칠이 안 되어 금방 끌어내렸다.
그런데 1945년 9월 이래 한반도 남쪽에 꽂힌 성조기는 6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왜 뽑히지 않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무능하다고 욕하는 19세기말의 조상들도 성조기를 단 며칠 새에 뽑아버렸는데, 오늘날의 한민족은 60년 넘게 성조기를 방치하고 있으면서도 19세기말의 조상들을 무능하다고 비판할 수 있을까?
일제 36년의 두 배에 가까운 60년이 넘도록 한반도 남부에서 여전히 휘날리고 있는 저 성조기를 보면서, 신미양요 때의 그 배짱은 다 어디로 갔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화를 일백 번 고쳐 한다 해도, '나의 운명은 나 스스로 결정한다'는 한민족의 강한 기질만큼은 백골이 진토이 되도록 지키고 또 지킬 만한 가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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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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