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추밭. 앞으로 병해충 없이 잘 자라주면 정말 좋겠다.전갑남
풀벌레 소리는 암만 들어도 마땅히 표현할 말을 찾기 곤란하다. "귀 뚜루루… 또르르, 찌르르찌르르!" 참 희한한 자연의 소리이다. 어둑하기 시작할 때 들리는 소리가 동이 트는 시간까지 들린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물기 머금은 깜깜한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까? 그래도 가만히 귀 기울여 들으면 청아한 목소리가 참 듣기 좋다.
어느 틈엔가 가을의 전령사인 풀벌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귀뚜라미, 여치와 같은 풀벌레가 울면 가을 들머리를 알리는 징후이다. 궂은비에다 후텁지근한 날씨로 시간가는 줄 몰랐는데, 어느새 가을의 문턱인가? 하기야 절기상으로 입추가 지났으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 날도 멀지 않으리라.
이른 새벽, 아내가 잠에서 깼다.
"여보, 비 안 오죠?"
"지금은 잠잠한데, 모르지!"
"오늘은 고추 딸 참이지?"
"비 안 오면 후다닥 해치우자구."
정말 날이 맑았으면 좋겠다. 근 보름 동안 햇볕 드는 날이 드물었다. 장대 같은 소나기는 차라리 시원하다. 비인지 안개인지 하루종일 구질구질 내릴 때는 마음도 어수선하다. 아무튼 올여름은 유별난 것 같다. 잔뜩 흐린 날씨에 거센 비바람까지 쉴 날이 없다.
고추 따는 날... 비야 제발 내리지 마라
오늘(15일)은 그간 비 때문에 미뤄둔 고추를 따야겠다. 아내와 둘이서 800여 주 고추를 따려면 한나절은 밭에서 살아야 할 성싶다.
아침을 먹고 마당에 나왔다. 하늘은 잔뜩 구름을 머금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산허리에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제발 고추 따는 동안만이라도 비가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웃 할머니도 밭에 나오셨다. 죄다 망가진 열무를 뽑아내고 있다. 내 발자국 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맞이한다.
"오늘은 비 안 온댔지? 원, 세상에! 요샌 빨래 마를 새도 주지 않네!"
할머니는 걱정이 많으시다. 파밭에 대파가 비바람에 쓰러졌다. 해가 나면 빨리 거둬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 씨가 여문 참깨도 빨리 베어 털어야 한다. 비 때문 손을 놓아 일이 많이 밀리셨다고 한다.
할머니가 허리를 펴고 긴 한숨을 내신다. 얼굴이 밝지 못하다.
"할머니, 고추는 많이 따셨어요?"
"고추? 첫물은 그런 대로 땄어! 병치레를 해서 앞으로가 걱정이야."
"겉보기는 괜찮아 보이던데요."
"아냐, 쓰러지고, 벌레 먹고 시원찮아."
"저희 것도 쓰러지기는 했는데, 아직 장담은 못하겠어요."
"농사는 하늘이 도와줘야 하는 거야!"
수십 년간 농사를 지은 할머니이시다. 올해처럼 장마가 끝난 뒤에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는 흔치 않은 일이란다.
입추가 지나면 나락모가지가 올라와 벼가 한창 익어간다. 이때 내리는 비는 그리 반갑지 않다. 입추 뒤에 비가 닷새 동안만 계속 돼도 비를 멎게 해달라는 기청제(祈晴祭)를 올렸다고 한다.
할머니가 오늘은 딴 일 하지 말고 서둘러 고추를 따라한다.
만만찮은 고추농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