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물 소리에 나그네의 귀만 홀로 아득해라

사적 제141호 광주광역시 충효동 도요지와 풍암정

등록 2007.08.16 16:18수정 2007.08.16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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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동 도요지 가는 길에서 바라본 충장사.
충효동 도요지 가는 길에서 바라본 충장사.안병기
아기 장수 설화를 떠올리게 하는 김덕령 장군

충장사를 지나서 서림 마을을 향해 간다. 충장사는 김덕령을 기리고자 세운 사당이다. 김덕령 장군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와 함께 여러 차례나 왜병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9년(1596)에 일어난 이몽학의 난은 그를 뜻밖의 사지로 내몰고 만다.


충청도 순찰사 신경행이 김덕령이 이몽학과 내통했다고 무고하는 바람에 체포된 그는 정강이뼈가 부서지는 등의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옥사한다. 신경행이 그를 무고한 것은 어쩌면 백성의 신망을 얻은 전쟁 영웅들 때문에 자신의 왕권이 무력해질 것을 염려한 선조의 속마음을 간파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교가에는 두 사람의 인물이 등장한다. "정송강 정철도 이곳에서 나셨고 김덕령 장군도 이곳에서 나셨네." 김덕령 장군에 관한 전설들은 마치 아기 장수 설화를 연상케 한다. 가난한 평민의 집에 날개 달린 아기장수가 태어났으나 꿈을 펴지 못하고 날개가 잘려 일찍 죽었다는. 영웅의 죽음에 상심한 백성들은 자신의 마음을 달래려는 방편의 하나로 갖가지 전설들을 지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당에서 200여 m가량 떨어진 곳엔 금곡 마을이 있다. 요사이 무등산 수박 재배로 이름난 곳이다. 초등학교 때 친구 기석이는 아직도 그 마을에 살고 있을까. 산기슭을 다 내려서자 눈 앞에 서림 마을의 풍경이 오롯이 펼쳐진다.

도요지와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충효동 도요지.
충효동 도요지.안병기

가마터.
가마터.안병기
원효 계곡으로 향하는 길 들머리 우측엔 사적 제141호 충효동 도요지가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상감청자와 분청사기, 백자 등을 굽던 곳이다.


보호각의 문을 살그머니 열고 가마터로 들어간다. 전등이 켜 있긴 하지만 내부는 어둑어둑하다. 눈이 차츰 어둠에 익숙해지자 도자기를 집어넣는 번조실과 굴뚝실로 이루어진 가마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터는 1964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는데 분청사기를 빚을 수 있는 모든 기법이 망라된 분청사기 파편들이 나왔다고 한다. 퇴적층 상부에선 덤벙·귀얄 분청과 백자 조각이 나왔으며 그 아래층에선 박지·조화·상감·분청 등이 나왔다고 한다. 충효동 도요지는 청자부터 분청사기를 거쳐 백자로 넘어가는 과정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 도요지가 있는 서림 마을 살던 내 초등학교 친구들에겐 매국노(?)의 이력이 있다. 밭에서 일하다가 발견한 상감청자를 송정리 미군들에게 자기 주둥이가 깨진 것은 500원, 온전한 것은 1,000원씩에 넘겼다고 서림 마을 살던 친구들은 학교에 와서 자랑하곤 했다. 지금 같으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일이다.

또 서림 마을 아이들은 또 말굽 모양으로 된 아주 작은 도자를 주워 와서 자랑하며 닷짝걸이('공기놀이' 의 전라도 사투리)를 하기도 했다. 어쩌면 도공들이 일거리가 없을 적에 심심풀이 삼아 만들던 것이었는지 모른다.

일자무식이었지만, <삼국유사> 속 이야기를 두루 꿰고 있을 정도로 천부적인 이야기꾼이셨던 우리 할아버지께선 어린 내게 고려자기가 나올 수 있는 여건에 대해 이렇게 들려 주셨다. 고려자기가 나오려면 마을 입구만 빼고 3면이 막혀 있어야 하며 마을 이름에 '수풀'림(林)'자가 들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옛날 천민집단이 거주하던 마을의 형태가 그랬는지 모른다.

도요지 앞에서 바라본 소쇄원 쪽 풍경.
도요지 앞에서 바라본 소쇄원 쪽 풍경.안병기

풍암 저수지.
풍암 저수지.안병기
도요지를 나와 풍암 저수지 제방에 선다. 내 초등학교 시절엔 이 저수지가 없었다. 원효 계곡 상류로부터 흘러드는 물을 모아 놓은 저수지다. 이 저수지의 물은 굽이굽이 흘러가 동림 마을 앞을 지나서 조선 시대 대표작 원림인 소쇄원 앞에서 창계천과 만나 광주호로 흘러든다.

저수지의 물빛이 아주 파랗다. 물빛이 이렇게 파란 것은 하늘빛을 그냥 투과시킨 탓일 것이다. 흔히 어린 아이의 마음을 일러 '파란 마음'이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말을 여과 없이 그대로 투과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이 저수지가 생기기 전, 무등산으로 소풍가려고 한 마리 물고기처럼 계곡을 거슬러 오르던 내 마음을 생각한다. 그때는 내 마음도 이 물빛처럼 온통 파란빛이었을 것이다.

아직도 원시의 고요가 숨 쉬는 풍암정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 풍암정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 풍암정안병기

「풍암정기」가 새겨진 편액.
「풍암정기」가 새겨진 편액.안병기
저수지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풍암정을 향해 간다. 계곡에 물이 많지 않다. 2년 전 여기 왔을 적엔 전날 내린 비로 계곡물이 불어 풍암정으로 건너가느라 애를 먹었다. 풍암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김덕령의 아우인 김덕보가 지은 것으로 알려졌다.

형이 의병활동을 하다가 논공행상은커녕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꼴을 지켜본 그는 속세를 멀리 하고자 이곳에 정자를 지었을 것이다. 풍암정이라 이름 붙인 것은 원효 계곡의 가을 단풍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리라.

이곳은 사람의 눈을 만족하게 할 만큼 뛰어난 기암절벽은 없다. 그러나 내가 소풍다니던 시절만 해도 인적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원시의 고요가 살아있는 곳이라고나 할까. 풍암정 마루에 앉아 졸졸졸 흐르는 계곡물을 지켜보는 김덕보의 모습을 떠올린다.

배경이 비록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아니지만 영락없이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의 한 장면이다. 사람들은 물을 통해 풍경을 관조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을 관조하게 된다. 이곳에 머물던 그는 오래지 않아 형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원망을 삭이고 흔들림 없이 고요한 마음을 갖게 되었으리라.

가만히 정자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정자 바로 앞으로 흐르는 원효 계곡의 맑은 물소리가 나그네의 귀를 아득하게 한다. 정자 뒤에 서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뿜어내는 솔향을 싣고 불어오는 바람이 내 오욕과 삿된 마음을 절로 씻어 내리는 듯하다. 마음에 사악함이 전혀 없는 사무사(思無邪)의 경지란 이런 것을 두고 말함인가. 조금 더 앉아 있다가는 눈물이 흐를는지도 모른다. 그만 마루에서 일어선다. 서림 마을 앞 논배미에 심어진 벼들이 유난히 푸르다.

태풍이 지나간 들
주저앉아버린 벼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대여섯 포기를 함께 모아
지푸라기로 묶어 주니
혼자서는 일어서지 못하던 벼들이
서로를 의지해 일어서는 들판

쓰러졌다 일어나 서로들 얼싸안다가
어깨동무하고 다시 길을 가는 듯한
벼들을 바라보니
나도 누군가와 어깨동무를 하고
길을 가본 지가 참 오랜 일인 것 같습니다
_김인호 시 '어깨동무 -섬진강 편지5' 전문


몇 년 전 어느 지인을 통해 '섬진강 시인' 김인호가 나를 안다고 하는 말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최근에 알고 보니 그는 내 초등학교 4년 후배였다. 그렇다면 우린 적어도 봄, 가을 두 차례씩 4번 정도는 풍암정을 거쳐 원효사로 가는 소풍 길을 함께 했을 것이다.

서림 마을을 스치듯 지나간다. 아직도 이 마을을 지키는 초등학교 친구가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왔으니 한 번 얼굴이나 보고 갈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젓고 만다. 지금은 다만 내 마음 속에 쌓인 그리움을 조용히 음미하고 싶기 때문이다.

도요지가 위치한 서림 마을 풍경.
도요지가 위치한 서림 마을 풍경.안병기
ⓒ 2007 OhmyNews
#도요지 #김덕령 #이몽학 #청자 #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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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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