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보이지 않는 10만평 너른밭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규모입니다. 외국인 노동자 몇명과 함께 채소 농사짓고 있습니다.이우성
이곳은 한여름인데도 덥지 않다. 밤이 되면 긴 팔에 전기장판을 깔고 자야 한다. 여름 모종 키우기는 안성맞춤. 그러니 그가 이곳에서 여름 동안 휴식한다는 이유를 알겠다. 더위를 피해 이곳으로 농사일하러 오는 것이다.
"똥만 싸고 지구촌 오염만 시키고 가면 그게 무슨 인생이야. 한 시대 살면서 선배로부터 받은 것을 후배에게 온전하게 물려주는 것이 도리 아니야. 사회발전의 간단한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
선생은 하는 일이 너무 많아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이곳 말고도 충북 제천 봉양에 4000평 비닐하우스 농사도 있다. 제천 봉양면 한가지골에 친환경생태마을을 조성해 유기농업교육, 후배인력 양성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마을에는 유기농업 밭을 비롯해 세미나실, 황토방 등 각종 시설을 갖춰 놓고 있다. 유기농밀과 냉동 동결건조시킨 브로콜리잎을 섞어 브로콜리 국수, 쿠키, 빵을 만들어 판매도 하고 있다. 이곳 운영은 동생이 사업화해 '행복한 국수'에서 전담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심각한 아토피를 고쳐보자고 시작한 일이다.
통일농업에 대한 선생의 역할도 무게감이 있다. 그는 남한 농부로서는 처음으로 북한 땅에 농업기술을 전한 '통일농부'다. 1998년 현대아산의 지원으로 북한 북고성 남새농장에 비닐온실 1만2000평을 짓고 유기농법으로 멜론, 상추, 가지, 토마토와 같은 각종 채소를 심어 가꿀 수 있도록 했고, 삼일포에 3000평의 과수농장을 조성해 영농기술교육을 담당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대관령에서 육묘한 견본 배추, 고추 모종을 북송하기도 하는 등 활발한 북한지원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는 현재 북한에 우리 기술, 우리 자동화, 우리 효소 같은 것이 들어가 영농에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통일농업을 한층 앞당기는 역할을 할 것으로 자신한다. 독립군이 월급을 타고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목숨 걸고 가산탕진하고 해서 오늘 우리가 여기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것을 들으니 선생은 독립운동가임이 틀림없다.
그밖에 개성, 연변, 중국 가나안농군학교 등에도 그가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간다. 그저 농사가 좋아 시작한 일일 뿐, 선생에게 힘들다, 귀찮다는 얘기는 들어볼 수가 없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새가 없다는 것을 신조처럼 간직하고 산다. 병든 엄마가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건강한 생각, 건강한 농법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어릴 때 선생은 철도청 전기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남긴 이야기가 참농부로 살아가는 큰 밑거름이 되었다.
"병든 사람에게는 하룻밤이 길고 고달픈 사람에게는 한걸음이 멀며, 알고자 애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인생이 지루하다."
그는 중학교 시절 4H 활동을 통해 함께하는 삶, 공동체 삶, 나누는 삶에 대하여 배우게 되었고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힘을 모아 더 잘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하여 농업고등학교에 가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이해극 선생은 제천농고를 졸업하고 해군에 자원입대해서는 전기기술을 익혔다. 선생이 농민 발명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기기술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영향과 군대에서 익힌 전기기술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군대를 제대하고 그때부터 고향 제천 봉양에 돌아와 농사를 시작했다. 처음 고추농사를 시작하는데, 군대시절 태국에서 사시사철 고추가 열리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겨울 추위를 피하여 남들보다 더 빨리 고추를 딸 수 있는 방법을 시도했다. 고랭지인 제천에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남들보다 석 달이나 일찍 고추씨를 뿌려서 모종을 길러내 몇 번의 실패 끝에 남들보다 2∼3개월 일찍 풋고추를 수확하게 되었고, 고추농사를 지어 큰 성공을 거둔다.
다시 화학비료와 살충제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법으로 고추농사를 짓기 시작하였고, 유기농업을 통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고추를 많이 생산하는 '고추 다수확 왕'에 뽑히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익힌 농사기술을 다른 농민들과 나누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건강한 토양의 지력 배양만이 품질 좋은 농산물 생산 가능"
그 후 90년대 청옥산 600마지기 버려진 땅을 발견해 비옥한 농토로 바꾸기 위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숱한 어려움을 뚫고 '땅을 키우는 농부'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땅을 살리는 일은 결국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초기 폐허화된 농장에 휴경기 호밀 녹비재배로 땅을 살렸다.
안전하고 품질 좋은 농산물 생산을 위해 "병든 어머니가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없듯이 건강한 토양의 지력 배양만이 품질 좋은 농산물 생산이 가능하다"는 신념의 실천이었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일반 상추가 보관기간이 3일 정도인데 반해 15일까지 보관하더라도 싱싱함이 그대로 살아있을 만큼 저장성도 뛰어나다. 정성을 기울인 만큼 알차고 건강한 농산물을 거둘 때 그 보람이 농사짓는 재미고, 농부의 즐거움이라고 껄껄 웃는다.
무엇이든 자신이 신이 나서 하면 따라올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농부인 선생은 농사를 짓다 불편한 곳이 생기면 곰곰이 궁리해서 좀 더 편하게 만들어 쓰곤 한다. 발명가가 되기 위해 공부를 따로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생활 속에서 얻은 소재로 여러 가지 물건을 발명하게 된 것. 게으른 사람은 핑계를 찾고 지혜로운 사람은 방법을 찾는다는 것. 그래서 선생은 천재와 노력하는 사람마저 이기는 즐기는 사람이 되어 즐겁게 발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