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고우세요"란 말이 불쾌한 이유

나이듦의 '당연한' 이치를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다

등록 2007.08.02 10:43수정 2007.08.0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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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아직 참 고우세요. 피부도 곱고 머리숱도 적당하구요."


며칠 전 미용실에서 나를 추켜세우며 한 말이다. 머리를 만지는 동안 미용사들이 손님 듣기 좋으라고 빈말이라도 머리 짜내서 하는 걸 가지고 시비하자는 건 아니지만, '아직도 곱다'는 말이 내게는 덕담(?)으로 들리기는커녕 오히려 불쑥하니 불쾌감을 솟게 했다.

'아직도 곱다니….'

그런 말은 정작 누가 봐도 곱지 않은 나이에서나 듣게 되는 것 아닌가. '아직도 곱다'는 '빈말'을 믿고 싶고, 그 말에 적잖은 위로까지 받고는 '정말 그런가?'하면서 마지못해 확인해 보기 위해 거울을 슬쩍 보게 되는, 뭐 그런 나이에나 합당한 소리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아직' 고운 게 아니라, '당연히' 곱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그런 말을 들었으니 고맙기는커녕 '쇼크' 일수밖에. 하지만 그 미용사로서는 이렇게 우기는 내가 같잖지도 않을 게 뻔한 일일 터인데, 사실 그 날 나는 흰머리 염색을 하러 미용실에 갔었기 때문이다.

새치도 아닌 머리칼 전체의 흰 머리를 감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검정물을 들이고 있는 주제에 '당연히' 고운 나이라고 우긴다면 그야말로 착각이며 그런 나를 보고 누군들 웃지 않으랴. 게다가 어디 흰머리칼 뿐인가, 마흔 살 되자마자 돋보기 없이는 생활할 수 없게 된 처지에서 마흔 다섯이 된 지금까지 스스로를 아직도 '여자'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아직도 곱다'는 말 한마디에 꿈이 확 깨버릴 수밖에.


그날 미용실에서 검은 것보다 흰 머리칼이 더 많은 앞머리를 우격다짐으로 검게 만들고 나오면서도 나의 '정체'를 알고 있는 미용사의 한 마디에 적잖이 기가 죽어 인생무상까지 느끼며 심란해 하다보니 지난해 한국에서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지하철 노약자 석에서 생긴 일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이는 법률상 '교통약자'로 규정돼 있습니다. 노약자석과 별도로 교통약자들을 배려하기 위한 배려석이 생겼습니다. 시범적으로 이를 운용하고 있는 도시철도차량 내부 모습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이는 법률상 '교통약자'로 규정돼 있습니다. 노약자석과 별도로 교통약자들을 배려하기 위한 배려석이 생겼습니다. 시범적으로 이를 운용하고 있는 도시철도차량 내부 모습희망제작소
어느 날 어쩌다 지하철에서 장애인·노약자 석에 앉아가게 되었다. 예전과 달리 요즘 한국 젊은이들은 노약자나 장애인 석에 빈자리가 있어도 아예 비워둔 채 그대로 서서 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우선 앉아가다가 '임자'가 나타나면 그 때 일어서면 된다 싶어서 별 생각 없이 앉았다.

정거장이 몇 번 바뀌자 내 옆에 '자리 임자'들이 앉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내 바로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처음 자리를 양보 받던 날의 충격과 기억을 지울 수 없다는 말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벌써 자리 양보를 받을 나이인가, 아니, 나이야 속여 말할 수도 있지만 누가 보아도 남들 눈에는 내가 할머니로 보인다는 뜻이니 그 순간 그처럼 허무할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곱다고 했다가 내게 속으로 원망을 들은 애꿎은 미용사처럼, 그 날 그 아주머니에게 자리를 내줬던 어느 착한 젊은이 역시 죄 없는 원망 대상이 되었을 걸 생각하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아이고, 그런 말 하는 걸 보면 아직까지 다리에 기운 있다는 소리구먼. 내 나이쯤 되어보우. 냉큼 자리 털고 일어나지 않고 꾸물대는 것만 봐도 괘씸한 생각부터 들지. 오래 서서 가면 다리가 후들거려서 그저 앉을 자리만 보인다니까."

일흔 여섯이라는 그 옆의 노인이 그 아주머니를 단박에 타박했다. 그 노인이라 해서 '첫째 날의 충격' 이 없었을 리 만무하건만 이제 그 따위는 대수가 아니라는 뜻이리라.

그러자 바로 내 앞에 섰던 또 다른 사람이, 자기는 올해 칠십인데 어쩌다 바삐 외출 준비를 하다보면 노인들이 지하철을 그냥 탈 수 있는 증명서를 더러는 안 갖고 나올 때가 있단다. 그럴 때면 역무원에게 깜빡했다고 말하지만 그 말을 곧이듣지 않고 꼭 '쯩'을 보여 달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가 도저히 경로 혜택 연령자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니, 그럴 때면 매번 돈을 내고 탈 수밖에 없어 억울하다며 자랑이 아닌 척 자랑을 했다.

그 분은 이어서 친구들과 함께 어디를 갈 때도 유독이 자기한테만 '쯩' 확인을 하자고 하니 귀찮기도 하지만, 아직 그만큼 젊어 보인다는 뜻이니 내심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며 이번에는 드러내 놓고 자랑을 했다.

그런 말을 하는 그 분 표정은 젊음의 흔적에 대한 자부심으로 찬란하게 빛났기 때문에, '아직 젊은' 그 분이 내 앞에 서자마자 벌떡 일어나 '당연하게' 자리를 내놓은 내 자신이 경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우습기도 하고, 한편 서글프기도 한 이야기지만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애써 실감하고 인정하기 어렵기는 어디 그 노인들이나 나뿐이랴.

더 이상 새치라 우길 수 없을 정도로 머리숱 속에 듬성듬성 숨어있는 흰머리를 우연히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사람이 없나, 길을 가다 쇼윈도에 비친 저 구부정한 노인이 누군고 하고 보니 바로 자신이더라는 말로 늙어가는 것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미용실 사건'이 있은 후 어떻게 늙어갈 것인지, 요즘 들어 부쩍 생각하게 되지만 뭘 어떻게? 그냥 속절없이 늙어 가면 되지, 하고 스스로에게 정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아직도' 곱다는 말 한마디에 샐쭉해지는 지금의 마음가짐으로는 나이듦의 '당연한' 이치를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고, '아직도' 수양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오늘도 거울을 들여다보며 늘어나는 주름만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호주 온라인 뉴스, 시드니 톱신문에도 게재됩니다.

덧붙이는 글 호주 온라인 뉴스, 시드니 톱신문에도 게재됩니다.
#미용실 #나이듦 #지하철 #노약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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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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