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영유아를 동반한 이는 법률상 '교통약자'로 규정돼 있습니다. 노약자석과 별도로 교통약자들을 배려하기 위한 배려석이 생겼습니다. 시범적으로 이를 운용하고 있는 도시철도차량 내부 모습희망제작소
어느 날 어쩌다 지하철에서 장애인·노약자 석에 앉아가게 되었다. 예전과 달리 요즘 한국 젊은이들은 노약자나 장애인 석에 빈자리가 있어도 아예 비워둔 채 그대로 서서 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우선 앉아가다가 '임자'가 나타나면 그 때 일어서면 된다 싶어서 별 생각 없이 앉았다.
정거장이 몇 번 바뀌자 내 옆에 '자리 임자'들이 앉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내 바로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처음 자리를 양보 받던 날의 충격과 기억을 지울 수 없다는 말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내가 벌써 자리 양보를 받을 나이인가, 아니, 나이야 속여 말할 수도 있지만 누가 보아도 남들 눈에는 내가 할머니로 보인다는 뜻이니 그 순간 그처럼 허무할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곱다고 했다가 내게 속으로 원망을 들은 애꿎은 미용사처럼, 그 날 그 아주머니에게 자리를 내줬던 어느 착한 젊은이 역시 죄 없는 원망 대상이 되었을 걸 생각하니 슬그머니 웃음이 나왔다.
"아이고, 그런 말 하는 걸 보면 아직까지 다리에 기운 있다는 소리구먼. 내 나이쯤 되어보우. 냉큼 자리 털고 일어나지 않고 꾸물대는 것만 봐도 괘씸한 생각부터 들지. 오래 서서 가면 다리가 후들거려서 그저 앉을 자리만 보인다니까."
일흔 여섯이라는 그 옆의 노인이 그 아주머니를 단박에 타박했다. 그 노인이라 해서 '첫째 날의 충격' 이 없었을 리 만무하건만 이제 그 따위는 대수가 아니라는 뜻이리라.
그러자 바로 내 앞에 섰던 또 다른 사람이, 자기는 올해 칠십인데 어쩌다 바삐 외출 준비를 하다보면 노인들이 지하철을 그냥 탈 수 있는 증명서를 더러는 안 갖고 나올 때가 있단다. 그럴 때면 역무원에게 깜빡했다고 말하지만 그 말을 곧이듣지 않고 꼭 '쯩'을 보여 달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가 도저히 경로 혜택 연령자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니, 그럴 때면 매번 돈을 내고 탈 수밖에 없어 억울하다며 자랑이 아닌 척 자랑을 했다.
그 분은 이어서 친구들과 함께 어디를 갈 때도 유독이 자기한테만 '쯩' 확인을 하자고 하니 귀찮기도 하지만, 아직 그만큼 젊어 보인다는 뜻이니 내심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며 이번에는 드러내 놓고 자랑을 했다.
그런 말을 하는 그 분 표정은 젊음의 흔적에 대한 자부심으로 찬란하게 빛났기 때문에, '아직 젊은' 그 분이 내 앞에 서자마자 벌떡 일어나 '당연하게' 자리를 내놓은 내 자신이 경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우습기도 하고, 한편 서글프기도 한 이야기지만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을 애써 실감하고 인정하기 어렵기는 어디 그 노인들이나 나뿐이랴.
더 이상 새치라 우길 수 없을 정도로 머리숱 속에 듬성듬성 숨어있는 흰머리를 우연히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사람이 없나, 길을 가다 쇼윈도에 비친 저 구부정한 노인이 누군고 하고 보니 바로 자신이더라는 말로 늙어가는 것을 비로소 인정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미용실 사건'이 있은 후 어떻게 늙어갈 것인지, 요즘 들어 부쩍 생각하게 되지만 뭘 어떻게? 그냥 속절없이 늙어 가면 되지, 하고 스스로에게 정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아직도' 곱다는 말 한마디에 샐쭉해지는 지금의 마음가짐으로는 나이듦의 '당연한' 이치를 받아들이기가 무척 어렵고, '아직도' 수양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에 오늘도 거울을 들여다보며 늘어나는 주름만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호주 온라인 뉴스, 시드니 톱신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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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지냈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를 꾸리며 자유칼럼그룹 www.freecolumn.co.kr, 부산일보 등에 글을 쓰고 있다. 이민 칼럼집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과 <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 공저 <자식으로 산다는 것>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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