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야, 분꽃 피걸랑 저녁쌀 담가 놓아라"

[북한강 이야기 252] 우리 사랑이 의심스러워요

등록 2007.08.01 13:33수정 2007.08.02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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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가마솥더위가 극성인데도 고향 앞마당엔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 피어나 옛이야기 나누자 합니다. 앞마당엘 들어서면 백일홍, 봉숭아, 맨드라미, 분꽃, 댑싸리, 채송화, 해바라기들이 다보록 피어나 잃어버린 그리움을 되살려줍니다. 이 토종 꽃들이 신통하기만한 것은 별로 돌보지 않아도 한 여름이 시작되면 예서 쑥, 제서 쑥쑥 피어나 더위를 식혀주기 때문입니다.


내 어머닌 꽃을 좋아해 분꽃, 봉선화, 맨드라미, 채송화들을 장독대 옆, 봉당과 처마 밑, 마당가에 가득 심어놓고 여름내 좋아라고 했습니다. 만날 이 토종 꽃만 심었기 때문에 꽃은 이들이 전부인가보다 하고 어린시절을 보냈고, 아직까지 이 꽃들을 살갑게 여기는 것도 다 어머니 덕분입니다.

분꽃은 해마다 다른 색으로 피어나기 때문에 꽃말은 '우리 사랑이 의심스러워요.'입니다. 사랑의 깊이가 의심스러우면 혼색으로 핀 분꽃을 한 번 선물해 볼 일입니다.
분꽃은 해마다 다른 색으로 피어나기 때문에 꽃말은 '우리 사랑이 의심스러워요.'입니다. 사랑의 깊이가 의심스러우면 혼색으로 핀 분꽃을 한 번 선물해 볼 일입니다.윤희경

당신은 특히 분꽃을 좋아했습니다. 시계가 없던 시절 분꽃은 어머니 시계였습니다. 들일을 나갈 때면 나를 불러 '아가야, 분꽃이 피어오르면 보리쌀을 물에 담가 놓고 저녁쌀 씻어놓아라' 신신 당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공회당에 놀러가 조무래기들과 땅 뺏어먹기, 비석치기, 공차기 놀이를 하다보면 어느새 분꽃 피어나 저녁 향기를 몰고 옵니다. 저녁쌀 생각에 집안엘 들어가지 못하고 분꽃 옆에서 서성거리면 언제인 듯싶게 '어서 손발 씻고 저녁 먹으렴' 했습니다. 그럴 땐 엄마 얼굴이 분꽃보다 더 곱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분꽃이 혼색인 것은 전설에 나오는 소녀가 여자가 되고 싶다는 몸부림을 치며 성전환을 외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분꽃이 혼색인 것은 전설에 나오는 소녀가 여자가 되고 싶다는 몸부림을 치며 성전환을 외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윤희경

분꽃은 해질녘 꿈처럼 피어오릅니다. 한 꽃대 줄기에서 빨강, 노랑, 보랏빛이 혼색으로 피어날 때면 마법을 보듯 신기합니다. 저녁 무렵에 꽃이 피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beauty of the night'(저녁의 미녀)로, 오후 네 시경에 피어나 'four o' clock'이라고도 합니다. 또 해마다 다른 빛깔로 피어나 꽃말은 '우리 사랑이 의심스러워요' 입니다.

분꽃은 언제 보아도 다소곳이 피어나 새색시 볼연지를 보듯, 때 묻지 않은 소녀의 속살 냄새가 납니다. 더구나 음력 열나흘 달빛 아래서 바라보면 달빛 냄새가 피어오를 것만 같습니다.


노랑 분꽃
노랑 분꽃윤희경

분꽃도 시리고 서러운 전설을 갖고 있습니다. 옛날 폴란드의 한 성주가 자식이 없었습니다. 자식을 점지해달라고 신에게 기도를 올렸습니다. 기도발이 통해 자식은 주었지만 딸이었습니다. 성주는 욕심쟁이어서 아들을 낳아 후계자로 삼고 싶어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남장을 시켜 이름도 '미나비니스'라 하고 남자처럼 교육을 시켰습니다. 활쏘기, 말 타기, 사냥 법, 술과 담배도 남자처럼 마시고 피우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남장소녀는 어느새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남자는 성주의 부하였습니다.


참다못해 어느 날 이 사실을 성주에게 고해 용서를 빌고 결혼을 허락해 달라 했습니다. 그러나 욕심쟁이 성주는 이를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소녀는 갖고 있던 칼을 땅 바닥에 꽃아 놓고 처음으로 여자처럼 울다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에 여리고 시린 꽃 한 송이가 피어났으니 '분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 분꽃은 오늘도 여러 색으로 변해갑니다. 아마도 소녀가 남장을 벗고 성 전환의 몸부림을 치느라 색깔이 변하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적색 분꽃
적색 분꽃윤희경

더구나 희한한 것은 분꽃 열매입니다. 소녀가 '나는 여자가 되고 싶어요' 하며 소리치던 울부짖음과 가슴앓이에 색이 그만 새까맣게 되었는가 싶기도 합니다. 겉은 검지만 씨앗 속엔 하얀 꽃 가루가 가득합니다. 납 성분이 있는 파우더보다 훨씬 더 윤이 나고 흡인력이 강하다 전해 오고 있습니다. 자연 화장품의 원조, 분꽃이 한결 더 우러러 보입니다.

백일홍
백일홍윤희경

오늘도 많은 토종 꽃들이 피어나 마당에 가득합니다. 꽃들을 감상하며 더위를 식히다 보니 벌써 오후 네 시가 가까워옵니다. 처마 밑 분꽃 속에서 또 그 옛날의 어머니 목소리 듣습니다. '아가야, 분꽃 피걸랑 저녁 쌀 담가 놓아라.'

화초 호박
화초 호박윤희경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우측 상단 주소를 클릭하면 쪽빛 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에서 시골과 고향을 사랑하는 많은 님들과 또 다른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에도 함께합니다. 우측 상단 주소를 클릭하면 쪽빛 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에서 시골과 고향을 사랑하는 많은 님들과 또 다른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분꽃 #북한강 이야기 #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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