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사 가는 길.안병기
이제 저 모퉁이만 돌아가면 노령산맥의 끝자락에 자리한 백암산에 이를 것이다. 해발 741.2m의 상왕봉 아래 백학봉을 거느리고 내장산, 입암산과 등을 맞댄 백암산. 나는 지금 고불총림 백양사로 가는 길이다. 백양사는 경치가 좋아 예로부터 조선팔경의 하나로 '남금강'이라 불리기도 했던 백암산 발아래 있다.
25년 전, 백양사에서 며칠 동안 머문 적이 있다. 내장산 자락을 타고 넘어와 백양사에 닿은 시각은 오후 4시경. 난 그때 불가에선 흔히 만행이라고 부르는 무전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하룻밤 숙소를 청하자, 이제 갓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젊은 원주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불쑥 한 마디를 뱉는다.
"왜, 그렇게 자학을 하세요?"
자존심이란 자신의 심중을 들키기 싫어하는 사람이 끝내 지키고 싶어 하는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다. 누군가 내게 무전여행을 하는 이유라도 물어보면 '존재의 시원을 찾으려고'라고 그럴 듯하게 대답하곤 했지만 사실 내 의식의 끝에는 존재를 산산조각내고 싶은 깊은 '자학'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 내 속내를 나보다 십여 년이나 아래인 원주에게 들켜버린 게 창피해서인지 난 불같이 화를 냈다.
"아니, 이 어린 중놈이! 네가 생에 대해 뭘 알아? 그래, 난 자학하고 있다. 넌 그럴 듯하게 자학이나 해봤느냐? 자학 한 번도 안 해본 놈이 무슨 중노릇이나 제대로 하겠어?"
마침 옆을 지나가던 총무 스님이 아니었다면 그날의 말다툼은 육박전으로 치달았을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그 가벼운 말싸움의 전리품으로 며칠 동안의 숙박을 얻어들었다. 그리고 "물의 본래 색깔이 무엇이냐"라거나 "하늘의 본래 색깔이 무엇이냐" 따위의 논쟁에도 참여하게 되는 기이한 기회를 얻기도 했다.
백양사를 향해 간다. 앞산 봉우리의 구름이 '어서 오라' 나그네를 호객한다. 저 구름은 국립공원 내에서의 호객행위는 단속대상이라는 걸 알까. 그 부름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속도를 더한다. 길옆으로 줄지어선 비자나무들과 몇 백 년 묵은 거대한 갈참나무들과도 반가운 해후의 인사를 나눈다.
이곳에 오르면 속(俗)과 성(聖)을 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