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중국침략에 관한 부분이 요약·설명되고 있는 파워포인트 화면.김종성
"그런데 일본은 이런 삼각관계를 무시했다"는 것이 왕 교수의 말이다. "일본은 중국 인민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바로 그런 배경에서 그들이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다른 말로 하면, 일본은 앞의 가위·바위·보 관계에 무지했다는 것이다.
중국 인민의 위력 인식한 서양, 그렇지 못했던 일본
왕 교수의 말처럼, 중국 인민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일본과 서양은 분명한 대조를 보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양열강은 1860년대 이후로 중국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데 반해, 뒤늦게 중국 무대에 후발주자로 나타난 일본은 군사적 침략을 통해 중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원대한 야심'을 품었다. 서양열강은 중국 인민의 위력을 인식했지만, 일본은 그렇지 못한 것이다.
2005년 12월 11일자 <제2차 세계대전에 가려진 중국의 항일전쟁>이란 기사에서 소개한 바 있듯이 일본이 1927년에 중국정복계획을 담은 다나카 상주문을 국가정책으로 채택할 수 있었던 데에는, 왕치 교수의 말처럼 그들이 중국정부의 무능함만 보았지 중국 인민의 위력은 깨닫지 못한 것도 한 가지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위의 삼각관계에 어두웠던 일본은 서양열강이 중국무대에서 물러나기 시작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오히려 중국침탈에 더욱 더 열을 올리면서 중국 민중의 미움을 한 몸에 안게 되었다(2005년 12월 7일 기사 <후발주자 일본이 중국을 더 많이 침탈했다> 참조).
물론 일본이 후발주자로서 중국을 더 많이 침탈한 데에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한 가지는 왕치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중국 인민의 저력에 대한 무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일본은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민중의 저항에 밀려 1945년의 패망을 맞이하고 말았다. 물론 일본의 패망에는 한국 민중의 저항도 중요한 몫을 하였다. 중국무대에 먼저 진출한 서양열강 중에는 중국침략 때문에 패망한 나라가 하나도 없는데, 유독 후발주자인 일본만이 중국 등에 대한 침략으로 인해 패망의 쓴 잔을 마시게 된 것이다.
그동안 미국의 영향을 받아온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일본의 패망이 미국의 원폭 투하 덕분이라는 식으로 가르쳤지만, 역사적 진실을 놓고 본다면 일본은 분명 한국과 중국 민중의 저항 때문에 패망한 것이다.
그것은 일본의 주된 표적이 한국·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대륙이었다는 점, 일본과 주로 싸운 상대가 한·중 두 민족이었다는 점, 일본군 100만 대군이 중원에서 발이 묶인 것이 패전의 결정적 계기였다는 점, 진주만 기습은 중국 전장(戰場)에서의 부진을 만회하기 위한 국면 전환용에 불과했다는 점, 원폭 투하 이전에 이미 일본군은 전쟁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약화되어 있었다는 점 등으로 실증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중국, 전통을 강하게 고집하는 기질 가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