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산서원에서 일박하고 답사에 나서는 한길역사기행 일행한길사
8월의 호남평야에서 동학농민군의 함성을 체험한 우리의 두 번째 한길역사기행은 10월 19일, 20일 '안동의 하회마을과 도산서원·병산서원'을 주제로 하여 진행되었다.
지금은 많은 길들이 뚫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산하와 국토가 작아졌다. 그 무렵에 서울에서 안동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말이 연휴가 되면 일찍 떠날 수 있어서 역사기행 일행들은 더 많은 현장을 답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통은 토요일 오후 1시 30분쯤에 서울을 떠났다.
그날 우리 일행이 머물기로 되어 있는 병산서원에 도착했을 때는 밤 11시였다. 지금은 버스가 병산서원 앞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그땐 하회에서 버스에 내려 밤길을 2킬로미터 정도 걸어가야 했다. 나는 3주일 전에 우리가 기행할 일대와 숙소를 사전답사까지 했다. 특별한 사전 정보와 연계가 없는 한 우리는 사전답사를 했다. 특히 우리가 가는 역사현장이란 일반인들이 가는 곳이 아니었다. 또 큰 버스가 들어가기란 대단히 힘든 길이었다.
작은 일화도 있다. 임진왜란을 주도해서 치뤄낸 명신 유성룡을 모신 병산서원이다. 또 안동이란 조선유학의 근거라고도 할 수 있고, 보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보수적인 전통을 갖고 있었다. 하회 강변에 우뚝 서 있는 병산서원은 참 아름답기도 하지만, 서원의 관계자들은 말하길 여자들은 서원 안에서는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간곡한 부탁으로 여성들도 서원 안의 방들을 나눠 잠을 자게 되었지만, 우리가 그날 저녁 식사를 끝내고 유현상 안동문화원장의 안동에 대한 소개강의를 끝내고 다시 충북대 유초하 교수의 '조선유학의 성격'에 대한 본격적인 긴 강의를 끝내고 나니 새벽 3시 30분이 되었다. 참여자들은 흐트러짐없이 유 교수의 열강을 끝까지 들었다. 깊은 산 새벽, 서원 대청에서 조선조 성리학의 사상사를 열강하는 강사와 그것에 함몰되어 열심히 메모하며 듣는 동시대들의 그 풍경이 신비롭지 않을 수 없었다.
일행들은 병산서원의 아름다운 풍광과 치열한 강의와 토론에 취해서 밤을 새우다시피하고 이튿날 답사에 나서서 하회마을의 골목과 고택들은 물론이고 안동 시내에 있는 독립운동가 이상룡 선생의 생가인 침천각, 퇴계의 사상과 정신이 서려 있는 도산서원을 찾았다. <중앙일보> 이근성 기자가 이번에도 동행해서 아름다운 기사를 10월 22일자 가을문화마당에 실었다.
"국토의 가을은 아름답다. 19일 오후 1시, 서울을 떠나 충주를 지나 이화령(梨花嶺)을 넘어 점촌을 거쳐 안동에 이를 때까지 줄곧 그 생각을 했다. 도서출판 한길사가 마련한 역사기행. 이번엔 안동문화권을 택했다. 안동지방은 한국사상사, 특히 퇴계 이황을 우뚝한 기둥으로 성리학의 거대한 맥을 형성한 땅. 예로부터 조선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일컬었다. 추로란 공·맹이 태어난 곳. 회사원·교수·소기업가·주부·대학생 등 40여 명의 기행자들이 그 맥을 찾아나섰다.
병산서원(屛山書院) 입교당(立敎堂)의 넓은 마루. 먼저 안동문화원장 유한상(柳漢裳) 씨가 구수하게 '안동인 기질론'을 펴보였다. 콩과 보리를 제대로 구별 못하는 어수룩한 사람들을 '숙맥'이라고 한다. 안동은 숙맥의 고장이다. 이(利)에 밝지 못하다. 또 안동은 생산성이 낮은 척박한 고장이다. 가난한 땅에서 숙맥스럽게 일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었다. 자식에게 제일 먼저 굶고도 굶지 않은 체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만큼 명예를 중요시했다. 없는 사람이 명예조차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나. 그러나 권력자에겐 명예를 주지 않았다. 가난하면서도 존경할만 해야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선생이다. '선생'이란 아무에게나 붙이는 이름이 아니다. 정말 명예스러운 사람에게만 붙여주는 존칭이었다
다음은 유초하(柳初夏) 교수가 '조선유학의 전개'를 강의했다. 우리는 최근 1백년간 근대를 살아왔다. 의식이나 생활방식·학문방법까지 서양적인 것이 지배하고 있다. 이제 유학·성리학 하면 생소한 것이 되어버렸다. 무가치하고 어려운 것으로만 치부해버린다. 그러나 1백년 전만해도 그것은 이웃끼리 친근하게 나눌 수 있는 얘기의 내용이었다.
고려후기에 도입된 성리학은 16세기, 즉 조선중기까지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초 성리학은 길재(吉再)의 문하생들에 의해 전파됐다. 투철한 의리정신과 집요한 실천의지로 무장했다. 중소지주 출신의 지식인(士)계층의 이념적 무기가 됐다. 혈통이나 공훈에 줄을 댄 귀족세력이 감당할 수 없는 우월한 논리로 맞섰다. 성공과 실패를 번갈아 겪었지만 네 차례의 사화(士禍)가 끝날 무렵 결국 조선 중앙 정계를 장악했다.
그러나 사정이 달라졌다. 어제의 '야'가 오늘의 '여'가 되고 '공격'의 입장에서 '방어'의 자세로 바뀌었다. 자체 내의 끊임없는 권력투쟁과 자기분열현상이 나타났다. 당쟁의 시작이다. 몰락양반이 양산됐다. 현실비판적인 이들과 계층 상승을 노리는 중인계층의 지도적 이념으로 나타난 것이 실학이다. 이로써 성리학의 역사적 기능은 조선중기로 끝났다. 성리학이 오늘날 우리 삶에 어떤 빛을 던질지 얘기하기는 조심스럽다. 그러나 형이상학이 파기된 지금, 가치를 포용하는 학문, 만물의 근원에 접근하려고 집요하게 노력했던 학문에 대한 의미를 재음미해볼 수 있지는 않을까. 총체적 진리에 대한 인간의 구원한 바람이기도 하니까.
귀로의 생각은 이랬다. 이 가을 궁핍해져가는 철학적 생산력을 자주 하기 위해서는 한번쯤 밟아볼 만한 땅이 아닐까라고."
역사기행을 끝내고 서울로 오는 귀로의 버스는 또하나의 토론의 장이 되었다. 강사 겸 안내로 참여하는 학자나 지식인들과 함께 마이크를 돌려가며 자신의 느낌과 견해를 주고받는 것이다. 나는 으레 맨 앞자리에 앉아 역사기행을 현장지휘하는 ‘안내’였는데, 특히 귀로의 버스에서 마이크를 들고 자기의 소감을 말하는 참가자들의 수준은 한결같이 대단하다는 감동을 받았다. 역사에 취하고 감동했기 때문이었을까, 선남선녀들은 아름다웠다.
지방에서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도 했는데, 지방 참여자들은 버스 속에서의 이 같은 토론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다. 그날 안동에서 서울까지 오는 데는 6시간이 걸렸는데, 솔직하게 자신의 견해를 토론하는 버스 속의 풍경 또한 참가자들이 함께 누리는 감동이고 행복이었다.
역사기행이 이렇게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자 고정으로 참여하겠다는 독자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제3회 한길역사기행은 '남한강 유역 민족사의 전개와 민중의 삶'을 주제로 잡았다. 한반도의 고대국가들이 쟁패를 벌인 남한강 유역 이곳 저곳을 살펴보는 한편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는 코스였다. 신경림 시인이 '남한강 유역의 민중의 삶과 민요'를 강의했고 고려대 역사지리학과 최영준 교수가 '길의 문화, 길의 역사'를, 충주공업전문대 김현길 교수가 '중원문화권의 역사와 정신'을 강의했다. 향토사학자 김예식 씨가 안내를 도왔다.
특히 최영준 교수의 길의 역사에 대한 강의는 참여자들 모두에게 길의 역사, 길의 문명에 대한 새로운 눈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길의 역사를 연구한 ‘영남대로’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영준 교수의 강의는 아주 구체적이고도 새로운 시각이어서 모두들 너무 좋아했다.
"우리는 길에서 우리 역사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다. 이 파노라마에서는 어느 한 시대의 경관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길이 생긴 이후에 일어났던 모든 사실이 나타난다. 길은 규모가 크고 시설이 사치스러운 것보다는 늘 쓰임새가 더 중요하다. 길은 서둘러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때에 충분한 시간과 공을 들여 만드는 것이 좋다. 우리는 서둘러 착수하고 성급히 마무리짓는 습성을 버리고 한번 만들어 자손 대대에 물려줄 수 있는 길을 만드는 전통을 수립할 때가 되었다."
강진의 유배지문화와 다산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