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대학에서 만난 노구교사건의 흔적

등록 2007.07.19 08:47수정 2007.07.19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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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대학의 정문인 서문.
베이징대학의 정문인 서문.김종성

이번 7월은 노구교사건이 발생한 지 70년이 되는 달이다. 베이징 남서쪽 교외의 소도시인 루거우차오(노구교)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계기가 되는 동시에, 동아시아인들의 항일역량을 결집시켜 결과적으로 일본의 패망을 초래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제2차 국공합작으로 대표되듯이,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중국인들은 항일이라는 기치 아래로 신속히 단결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단결 움직임은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국립서남연합대학의 결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중일전쟁(1937~1945년) 초기인 1938년 초에 중국 서남쪽인 윈난성 쿤밍에서 결성된 서남연합대학은 각각 베이징 및 텐진에 소재한 베이징대학·칭화대학과 난카이대학의 연합대학이었다.

노구교사건 발생 직후만 해도, 이 사건이 8년 전쟁으로까지 비화되리라고는 예상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 직후만 해도 위 대학들은 전화(戰火)를 피해 남쪽으로 피난길을 떠날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칭화대학이 이번 7월 6일에 발행한 주간지인 <신칭화> 1691호에 실린 첸다이순이라는 인물의 회고에 따르면, 노구교사건 직후에 국민당 정부가 개최한 뤼산회의에 참가한 중국 지도자들은 대체로 사건이 평화적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전망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정부 역시 사건 초기에는 불확대방침을 천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7년 7월 29일 베이핑(베이징의 당시 명칭)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자, 중국인들은 항일투쟁을 위해 신속히 결집하기 시작했다. 공산당과 국민당으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인들이 공동의 적에 맞서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의 예상과 달리 상황이 악화되자, 1937년 8월 국민당 정부는 베이징대학·칭화대학·난카이대학에게 후난성 창사로 가서 임시대학을 결성할 것을 명령했다. 수도 베이핑이 일본군에게 함락된 데에 따른 대응조치였다.


창사로 옮겼을 당시의 연합대학 명칭은 창사임시대학이었다. 이듬해인 1938년 초에 윈난성 쿤밍으로 다시 옮긴 뒤에는 대학 명칭이 국립서남연합대학으로 개칭되었다. 소속 대학들이 본거지로 돌아간 것은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의 일이었다.

노구교사건을 계기로 약 8년 정도 존속한 이 서남연합대학의 흔적을 오늘날의 베이징대학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숲과 호수와 잔디밭의 자연미가 아름다운 베이징대학 구내의 서북쪽을 걷다 보면, 숯에 그을린 것 같은 검은 흔적이 선명한 낡은 비문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국립서남연합대학 기념비'가 바로 그것이다.


대학 구성원이 보여준 높은 항일투쟁정신

베이징대학 구내에 있는 국립서남연합대학기념비.
베이징대학 구내에 있는 국립서남연합대학기념비.김종성
일본제국주의의 전면 침략 앞에서 속을 끓여야 했던 당시 중국인들의 애타는 심정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낡은 비문의 중간 부분은 숯으로 칠을 한 것처럼 검게 그을려 있다. 그리고 비문의 뒷면에는 당시 연합대학에 참여했던 학생 등 구성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앞서 언급한 <신칭화>에 따르면, 1937년 9월 25일 현재(당시 명칭은 '창사임시대학') 연합대학의 학생 수는 1120명, 교원 수는 148명이었다고 한다. 위 세 대학의 현재 규모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에 불과하지만, 전시 중에도 교원 1명당 7.6명의 학생 수를 유지했다는 것이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그저 대단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연합대학 결성이라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위 대학의 구성원들이 노구교사건 이후에 보여준 고도의 항일투쟁정신이다. 그들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피난을 가기보다는 제국주의 침략자들에게 맞서 기꺼이 투쟁하는 모험의 길을 선택했다.

칭화대학의 경우를 예로 들면, 여름방학 중이던 노구교사건 발생 당일만 해도 교내에는 200여 명의 학생밖에 없었지만, 사건 발생 이후에 학교로 속속 귀환한 학생 및 교직원들이 비상기구를 결성하여 학교를 지키는 한편 전시지원활동을 개시했다고 했다. 이들은 베이핑이 함락된 뒤에도 각지에서 항일투쟁을 계속 수행했다고 <신칭화>는 기술했다.

노구교사건이 발생한 직후에 베이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는 일인데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든 중국 학생들의 용기에 가슴이 왠지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동아시아에서 항일이 얼마나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남연합대학으로 변경된 뒤에도 소속 대학의 학생들은 각지에서 항일전쟁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쿤밍의 연합대학에 합류하지 않은 학생들은 팔로군이나 항일유격대 등의 조직에 가담하여 직접 참전하거나 혹은 전시지원활동에 참가했다. 한편, 쿤밍에 합류한 학생들은 계속해서 학업을 수행하는 한편 그들 나름대로 항일운동을 지원했다고 <신칭화>는 말하고 있다.

한족이 대다수라고는 해도 엄연히 50여 개의 종족으로 구성된 이 나라의 학생들이 말로만 공동체를 사랑한 게 아니라, 직접 전장에까지 나서는 등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위험을 감수했다는 것은 한국인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칭화대학의 정문인 동문.
칭화대학의 정문인 동문.김종성
일본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분열되지 않고 함께 힘을 모아 공동체를 지켜냈다는 동고(同苦)의 추억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중국사회의 통합을 일궈내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수십 개의 종족으로 구성된 중국은 이 같은 동고의 추억을 매개로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과거의 동고(同苦)가 미래의 동락(同樂)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서로 몰랐던 두 남녀가 아름다운 추억을 매개로 사랑을 키워가면서 하나로 통합되어 가듯이, 지금의 중국도 공동의 역사를 매개로 그런 '사랑'을 키워가며 하나의 민족이 되어가고 있다. '중국은 56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니까 언젠가는 분열될 것'이라는 전망은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낭만적인 희망사항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공동의 역사가 두 개의 서로 다른 집단들을 심리적으로 통합시키고 있다는 점을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의 경우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의 라이벌 의식

중국의 양대 대학인 베이징대학과 칭화대학 간에는 기본적으로 상당한 라이벌 의식이 존재하고 있다. 일례로, 베이징대학 학생들은 칭화대학(淸華大學)을 폄하하여 '칭얼대학'(淸二大學)으로 부른다고 한다. 칭화의 화(華)를 얼(二)로 바꾸어, 베이징대학이 일등이고 칭화대학은 이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칭화대학 쪽에서는 베이징대학에 대해 별다른 비하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 나름대로는 베이징대학을 '애써' 무시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한편, 칭화대학에는 "지금의 중국정부는 '만청정부'(滿淸政府)"라면서 칭화대학이 중국 최고라는 자부심을 드러내는 학생들도 있다.

만청이란 본래 1644년 이후의 청나라를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만주족이 지배한 청나라'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칭화대학 학생들은 '칭화대학(淸) 출신들로 가득한(滿) 중국정부'란 뜻으로 그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후진타오 국가주석 등 현 중국 지도부에 칭화대학 출신들이 대거 포진한 현실을 반영하는 표현이다.

서로 인접해 있는 두 학교 간에는 이처럼 치열한 라이벌 의식이 존재하고 있지만, 70년 전에 두 학교가 텐진의 난카이대학과 더불어 연합대학을 구성하고 나아가 항일투쟁을 함께 전개했다는 역사적 사실은 앞으로 두고두고 중국의 두 명문대학을 정신적으로 통합하는 '아름다운 추억'이 될지도 모른다.

베이징대학과 칭화대의 우의를 기념하는 비문. 베이징대학 구내에 있다.
베이징대학과 칭화대의 우의를 기념하는 비문. 베이징대학 구내에 있다.김종성

베이징대학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서 지난 1998년에 세워진 "베이다(베이징대학의 약칭)와 칭화, 그 우의는 언제나 푸르리라"는 양교 우호비문(베이징대학 구내 소재)을 통해, 공동의 항일투쟁 역사가 두 중국 대학을 통합하는 기능을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우호비문과 더불어 국립서남연합대학 기념비는 오늘날 동아시아인들을 단결시키는 데에 있어서 항일 혹은 반일이라는 모티브가 상당히 중요한 매개작용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우익세력은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을 퇴보적인 정서라고 폄하하고 있지만,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에서 반일 혹은 항일은 공동체의 아픈 과거를 청산하고 행복한 미래를 개척하도록 추동하는 일종의 진보적 원동력이라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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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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