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덕사지를 알리는 불발변종만
직지는 1901년 모리스 꾸랑이 저술한 조선서지 보유판에 수록되어 세상에 알려졌고, 1972년 '세계 도서의 해'를 기념하기 위한 '책' 전시회에 출품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직지의 간행 장소인 흥덕사지는 하권의 간기에 고려우왕 3년(1377)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였음을 명기(明記)하고 있다.
그동안 흥덕사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1985년 운천지구 택지개발사업중 유물이 많이 발견되어 공사가 중단되었고, 청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처음 발굴된 청동금구와 청동불발에 '서원부 흥덕사'라는 명문이 음각되어 있어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의 옛 연당리 마을이 바로 흥덕사지임을 입증하게 되었다.
현재 사적지 제315호로 지정된 흥덕사는 어느 때, 누구에 의해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흥덕사의 자취나 역사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도 없다. 발굴을 통해 흥덕사의 대략적인 규모만 파악되었을 뿐 화재로 없어지게 된 이유 등은 알지 못한다.
한 페이지가 42줄의 2단으로 이루어져 '42행성서'라고 부르는 구텐베르크의 성서는 1452년에 시작하여 1455년에 완성되었다. 구텐베르크의 성서보다 78년이나 빠른 1377년에 청주목 밖에 있는 흥덕사에서 직지를 금속활자로 인쇄하여 배포하는데 연화문인(緣化門人 ) 석찬(釋璨), 달잠(達湛), 시주 비구니 묘덕(妙德)이라는 간행 기록이 있다.
석찬과 달잠은 백운화상의 제자로 석찬은 수행비서격인 시자였고, 비구니 묘덕은 흥덕사 금속활자본과 취암사 목판본의 직지 간행에 모두 관여한 인물이다. 석찬과 달잠이 스승의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펴기 위해 묘덕의 시주를 받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직지를 간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