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약자 보호석엔 60세 이상만 앉아라?

지하철에서 벌어진 한바탕 소동 이야기

등록 2007.07.18 09:06수정 2007.07.18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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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폰을 귀에 꽂고 집으로 향하던 지하철 안에서 건너편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연이어 들려오는 말다툼 소리.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약주 한 잔 하신 어르신들의 말다툼이겠거니 했지만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목을 쑥 빼고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는 내 옆 사람. 나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1라운드. "잠깐이 3정거장이야?"

소리의 근원지는 노약자보호석이었다.

"아니, 젊은 사람이 저짝 가서 앉을 것이지 왜 여기 와 앉아 있어!"
"아줌마도 참! 잠깐 앉은 거요. 아이쿠 앉으셔."
"잠깐이 3정거장이냔 말이지!"
"나 참! 비어 있는데 앉으면 그거 좀 어때요!"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던 터라 누가 싸우고 있는 건지 확인이 불가능했다. 대화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니 노약자 석에 앉아 있던 젊은 여인을 할머니가 꾸짖는 것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또 다른 세 정거장이 지나도록 싸움이 잦아들기는커녕 두 사람의 언성은 더 높아만 가는 것이었다.

2라운드. "당신 몇 살이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두 사람은 기어코 나이를 들먹이기에 이르렀다.

"이거봐 당신 몇 살이나 먹었어!"
"알아서 뭐하시게."
"난 환갑 지난 지 오래야."
"아이코~ 아줌마 늙어서 좋겠수. 나이 많은 걸로 유세부리네 정말!"



양재역, 한 차례 사람들이 내리고 나니 상황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놀라웠던 건 다투고 있는 두 여인의 겉모습이었다. 염색 때문인지 새까만 머리에 기운 넘쳐 보이는 두 여인. 겉보기로는 노약자 보호석은 두 여인 모두에게 해당사항이 없어보였음에도 두 사람의 자리 쟁탈전은 쉽사리 끝이 나지 않았다. 결국 상황은 의자에 앉아 있던 여인이 하차함으로써 종료되었다.

이곳은 장애인·노약자·임산부를 위한 '보호'석인 거죠

지하철 3호선의 ‘장애인·노약자·임산부 보호석’ 표지판.
지하철 3호선의 ‘장애인·노약자·임산부 보호석’ 표지판.오마이뉴스 황승민
지하철마다 마련되어 있는 '장애인·노약자·임산부 보호석'이라는 이름의 좌석들. 두 여인의 다툼을 지켜보면서 과연 저 곳에는 누가 앉을 자격이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자리가 비어 있었기에 앉았다는 젊은 여인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비교적 판단 기준이 애매한 노약자의 경우, '○○세 이상만 앉으시오'라는 지시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다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보호석의 본래 취지는 역시 '보호'가 아니겠는가?

나이를 왈가왈부하며 '내가 몇 살 더 많으니 앉아야 한다'고 싸우는 두 여인을 지켜보던 나. '저기... 여기는 노약자 보호석이지 나이가 많다고 앉는 자리가 아니거든요?'라고 말하는 상상의 구름을 띄어본다.

지팡이를 쥐고 건너편 의자에 앉아 지켜보시던 할아버지께서는 두 여인의 싸움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지 참 궁금했다.

보호석은 무조건 비워놓는 것이 미덕?

임신 경험이 없는 젊은 비장애인으로서 나의 생각은 이렇다. '장애인·노약자·임산부 보호석'이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고려했을 때, 그것이 필요한 사람이 없다면 그 자리를 무작정 비워두는 것도 의미가 없지 않을까? 앉을 곳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결코 보호석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으면서도 융통성 있는 처우가 아닐까 싶다.

지하철 이용인구가 많은 출퇴근시간, 졸음이 쏟아져 당장이라도 잠이 들 것 같을 때 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비어 있는 장애인·노약자·임산부 보호석으로 가곤 한다. 당장이라도 저 자리에 앉아 잠을 청하고 싶지만 그것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할 뿐 얼굴에 철판을 깔고 용기를 내어 보기엔 사람들의 시선이 걸린다.

지하철뿐만 아니라 역사에 설치된 엘리베이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난 학기 다리에 깁스를 했던 내 친구 A는 계단을 오를 수 없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쓰여 있는 '장애인·노약자용 엘리베이터' 사인은 할머니 할아버지나 휠체어를 이용하시는 분들과 함께 타게 되었을 때 마치 자신이 잘못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고 한다.

지하철 역사에 설치되어 있는 '장애인·노약자용' 엘리베이터
지하철 역사에 설치되어 있는 '장애인·노약자용' 엘리베이터오마이뉴스 황승민
사회적 약자의 '보호'라는 이름하에 만들어진 시설물들. 본래의 취지를 잃지 않으면서 좀 더 유연하게 사용해도 되지 않을까?
#노약자 보호석 #지하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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