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유교문화박물관에 전시중인 <복제개혁반대 만인소>김기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한 아름의 두루마리가 왕에게 전달되고, 왕이 그것을 읽고 얼굴이 사색되거나 혹은 버럭 화를 내는 장면이다. 바로 유생들이 왕의 정치에 반대하거나 옹호하는 내용을 담은 상소를 대한 왕의 반응이다.
정치에 참여하는 신료들은 왕에게 자신과 붕당의 의견을 직접 전달할 수 있지만 관직에 진출하지 못한 유생과 유학들에게 상소는 유일한 정치참여의 통로였다. 유생들은 스스로 국가의 흥망과 유학의 성쇠에 관련된 일에는 반드시 발언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관료가 아니더라도 정치에 참여할 명분은 있었다.
율곡 이이가 "인심이 동의하는 것이 공론이고, 공론이 있는 곳이 국시(國是)이다"고 했듯이 위민정치를 표방한 조선에 있어서 공론의 형성과 이의 정치반영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붕당정치가 활성화 된 조선후기에 오면 특정한 상소가 정국의 변화를 가름하는 주요한 변곡점이 되는 일이 많았다.
"공론이 곧 국시"
사회저변의 의사를 반영하는 포괄성과 다중이 참가하는 집단성을 지닌 상소를 통한 공론은 국론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관료정치라는 제도 장치보다 더욱 부각되는 측면이 있었다. 연산 때에 일시 차단되기도 했던 공론 형성은 중종 반정 이후 등장한 기묘 사림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어 인종 대에 성균관이 공론소재로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와 대등한 위상을 확보하기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