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3월 재임용에서 탈락한 뒤 6년 8개월만에 복직한 김민수 서울대 미대 교수의 복직 후 첫 수업 장면.오마이뉴스 권우성
- 동감이 된다. 해직이 되고 보니 그동안에 피상적으로 사회를 읽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변화가 있었다. 몸을 움직이는 태도나 의미나 그런 것. 결례가 되는 표현일 수 있으나 해직기간 동안 선생님께서 행위예술을 하신 게 아닌가.
"옛날로 치면 유배자의 팔자였다는 생각이 든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그렇고 대개 유배지에서 굉장히 생산적인 작업이 많이 있지 않았나. 고통스럽긴 했지만, 그 기간 동안 나름대로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해야 할 연구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에 돌이켜 보면 나는 그 과정 자체가 의미 있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대한 나의 위치와 생각도 훨씬 더 명징해 졌다. 나를 부당하게 해직시켜 유배자로 단련시켜준 분들과 서울대 당국에 감사한다."
- 몇몇 해직 교수들은 심리적 압박 때문에 본인의 학문적 실천이 공백상태로 남는 분들도 많이 보았다. 그에 반해 선생님 같은 경우는 <디자인문화비평> 작업이라든가 여러 묵직한 학술적 작업을 지속해 온 건데 동력은 무엇인가. 스스로를 단련시킨다는 의미에서의 태도. 이런 게 있었나.
"절박함과 평상심이다. 벼랑 끝에 섰을 때 정말 중요한 것은 사선을 넘지 않고 중심을 잡는 것이다. 무너지면 모든 게 끝이라 절박함. 그러면서도 내상을 입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 이 과정에서 집중력이 나온 것 같다. 내가 느꼈던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궁극적인 싸움의 대상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통스럽지만 심기를 추스르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내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것을 집요하게 파 들어가는 것. 그것이 해직의 화마로부터 내상을 입지 않는 길이었다. 따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상황을 견디기 위해선 끝없이 몸과 정신을 움직여 벼랑에서 중심을 잡아야만 했기 때문에.
또 하나는 연구실을 잃지 않았다는 거다. 이 부분은 해직교수마다 상황이 다른데, 사립대학의 경우 나처럼 하기는 매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해직된 교수에게는 해당 대학측이 연구실 사용중지 가처분 신청 등의 법률적 압박을 가하기 때문에 감당하기 힘들 거다. 나 역시 초기에 연구실 퇴거명령이 있었지만, 연구실을 끝까지 지키면서 학문적 투쟁방식을 선택했다. 나는 투쟁을 위해 학문이라는 도구를 선택한 거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많은 해직교수들은 그 부분의 어려움 때문에 외국에 가서 생업을 버리거나, 최근 석궁사건으로 마음이 아픈 성균관대학의 김명호 교수의 경우처럼 외국에서 오랫동안 유랑생활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고.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내가 했던 학문적 투쟁을 다른 해직교수들과 일반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그것은 특수한 상황인 것 같다."
"아톰같은 '포돌이', 일제 도안기법 이어받아"
- 디자인의 역사성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한국 디자인의 식민성에 대해서는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모 대기업 심벌 디자인이 미국 어린이 학교의 디자인을 차용. 또 88올림픽의 엠블럼 역시 LA 올림픽 엠블럼의 아이디어 차용. 또 한국 미술사 안에서의 친일파의 문제를 지적하셨다. 정상적인 학계의 상황이었다면 논쟁이나 논문을 통해 해결될 문제가 법적 소송이나 해직문제와 겹쳐졌던 것 같다. 한국학계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평소 생각은 어떤가.
"결국 이 문제도 우리가 근대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타자의 시선으로 학문구조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복합적인 문제의 시발점은 바로 거기서부터라고 본다. <필로디자인>에서 1919년에 설립된 독일 바우하우스의 이야기를 했는데, 바우하우스의 근대성이란 바로 삶의 문제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출발했던 것이다. 그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현실적인 주거문제의 해결로부터 독일사회가 갖고 있었던 불안정한 사회정치사적 맥락에서의 자구책이었다. 즉 삶에 대한 해결책을 위해 바우하우스는 과학기술과 합리주의에 기초한 디자인 이념을 내놓았던 것이다. 따라서 바우하우스의 근대성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조형 활동이 아니라 사회 이념으로서 프로그램과 실천에 있었다.
반면 한국에서 근대의 경우, 과학기술과 디자인은 일제 식민지배의 가시적인 효과를 위한 볼거리, 즉 스펙터클로 이식되었다. 그러다 보니 과학적 합리성이 일상 삶 차원에서 확보되지 못했고, 바로 이 점이 최근에 황우석 교수사건까지 이어졌다고 본다. 과학이 생활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과학은 샤머니즘과 같은 주술적인 것으로 읽혀지는 것이다. 이 땅에서 근대의 과학기술은 상품의 신화 속에서 새로운 것 내지는 물질적 욕망의 쾌락과 깊이 유착되고 제국의 시선을 이식하기 위한 식민통치 수단으로 일종의 샤머니즘적 신화가 되어 성찰의 대상 너머에 존재하는 초대상이 되었던 거라고 본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날 과학기술을 일상적인 성찰의 대상으로 보기 힘들고, 종교적 신화와 비슷한 일종의 주술적 물신과 같은 것이 들러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디자인 역시 삶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근대성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일제의 타자적 시선에 의한 도안양식화 기법이 우리에게 식민 미술을 통해 전수되다 보니까, 삶의 문제와 동떨어진 장식의 효과로서 인식하게 되었다. 한데 일제가 가르쳐준 이 도안기법은 스스로 사고를 통해서 창조하는 방식이라기보다 어떤 틀을 요구로 한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말로 '혼(本)'은 형태를 뜻하는 '가타(形)'와 매우 밀접한 용어인데, 바로 이것이 일본 디자인을 이해하는 핵심이다.
아마 이명원 교수도 옛날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그림 그리면 노란색 크레파스로 형태 윤곽을 그리고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교육의 맥락이 일본의 도안양식화 기법 훈련에서 영향을 받아 넘어온 거다. 세상을 자기 눈으로 관찰해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서 있는 '혼(本)'과 '가타(形)'를 틀로 놓고 채색만 하는 이런 식의 디자인이 그동안 한국의 미술교육과 디자인이 의존했던 주된 방식이었다. 예컨대 지난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마스코트 '호돌이'나 일본의 아톰처럼 놀란 눈알의 경찰청 '포돌이'와 같은 넋 나간 이미지들은 이런 방식에 의존해 탄생한 것이다.
참고로 넋나간 디자인이란 자신의 주체적인 자아의 눈이 개입되지 못하고 형식에 목숨 건 디자인을 뜻한다. 사실은 이러한 시각과 미학의 치유가 말뿐인 과거사 청산보다 우리의 일상 시각문화에서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심지어 친일미술가 김기창과 이유태가 그린 세종대왕과 퇴계 초상이 버젓이 한국은행 만원권과 천원권 화폐에 새겨져 있는 어이없는 현실에서 말해봐야 입만 아프지만, 우리의 불행한 과거사는 역사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는 미학적이고 문화적인 문제인 것이다."
- 디자인뿐 아니라 한국 근대학문의 수용사 자체가 사실은 모방, 그러한 반성 없는 모방의 형식이다 보니까. 비유하자면 학계든 현실이든 외래종의 새것이 좋다는 이른바 '웰컴주의'가 성행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대학의 학문구조도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이 일제강점기 이래 학문 분류체계가 한국 대학에 제도화된 부분이 많다. 어떤 학문분야에서 교과목이란 것이 왜 그런 식으로 가르쳐져야 하는 것인지. 또 학문이 왜 그런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그동안 대학에 있으면서 답답했던 부분 중의 하나가 그런 거다. 요즘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학문의 위기, 역할과 기능에 대한 논의에서 대부분 내용과 결합된 구조가 아니라 내용은 빠진 구조의 문제만이 이야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요즘 대학에서 학과통폐합이 문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을 왜 묶여서 어떤 형태의 내용이 만들어질 것인가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순히 대학이 장사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의 영향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시대에 어떤 교육 목표와 내용을 어떤 체제로 학생들을 잘 가르칠 것인가의 논의가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최근 한국 대학에서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면서 주로 논의되는 것은 얼마만큼 투자와 지원을 더 해야 하는가의 외형적 문제뿐이다. 정작 내재적으로 어떤 교육목표가 인문학의 위기를 가져왔는지 성찰하고 대안을 위해 고민하는 모습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이것은 학문의 위기가 아니라 학문하는 사람들의 위기라고 본다."
"대한의원 100주년 기념? 서울대 정체성 의심케 해"
-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대학에서 비판적 지식인의 실종현상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인문학만의 위기는 아니라고 본다. 요즘 미술시장의 붐으로 미술품에 대한 투자가 급증해 대박이 터지고, 디자인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간다는 점에서 디자인을 포함해서 시각예술분야는 인문학 분야와는 달리 르네상스 또는 호황을 맞고 있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기에도 똑같은 위기가 있다. 지금 양적으로 팽창되고 산업적 수요만 증대되었을 뿐 내용과 철학의 부재라는 결핍 증후군이 똑같이 존재한다. 겉으로 들여다보면 호황이지만 내용적으론 궁핍하다.
인문학 위기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인문학이 오늘날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미디어와의 상호작용에서 실패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고 본다. 인문학은 사회적인 소통의 접점에서 팔다리가 없는 거고(머리는 있되 세상과 접점을 이루는 팔다리가 없는 거고), 우리 디자인이나 시각예술 쪽은 팔다리는 있되 머리는 없는 이런 기형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사실 기존학문을 깊게 파는 전문성의 틀을 고수하더라도, 최근의 바뀌는 미디어 지형이나 매체환경의 변화를 고려한다면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수평적인 통합학문의 세계도 만들어져야 한다. 인문학과 시각예술이라든지 다른 과학기술과 접합될 수 있는 학문분야의 논의과정도 이제 우리 사회에서 나와야 하는 시점이다. 지금 그 점에서 보면 그동안 인문학은 수직적 깊이만을, 외람된 표현이지만 그것도 제대로 파들어 가지도 못하면서 수평적인 소통의 너비를 확보하는 데 있어서의 실패가 인문학의 위기의 한 측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또 디자인과 시각예술 분야에서는 그동안 예술이라는 것을 하나의 기예적인 측면에서만 다뤄왔고, 특히 미술 같은 경우는 도제식 전수과정으로 이어져, 현대예술에서 말하는 철학적인 사유의 측면이라든지 다양한 세상의 문화와 접점을 이루는 소통의 단절 등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근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이루어진 학문구조라는 것이 이런 식의 변종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의 잘못된 부분을 어떻게 치유하고 새로운 모델을 만드는가의 고민들이 대학에서 해야될 본질적인 작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서울대에 들어오면서 근대법학100주년기념관이 있는 것을 보니, 서울대가 그 모태를 경성제대로부터 출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하는 낯선 느낌도 있었다. 최근의 서울대를 둘러싼 몇몇 문제를 보면 서울대가 갖고 있는 양적 팽창이 위기의 임계점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지난 3월에 서울대병원이 1907년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해 설립한 대한의원이 백주년되었다고 기념행사를 여론의 반대를 무시하고 강행했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서울대학교의 정체성을 의심케 하는 일이라고 본다. 서울대학교는 1946년에 설립되었기에 공식적으로 1924년 일제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을 기념하지 않는다. 이렇듯 서울대가 경성제대를 역사적 자산으로 여기지 않듯이, 식민지배의 수단으로 탄생한 대한의원을 서울대병원이 기념하고 계승할 수는 없다.
이렇듯 서울대 내부에서 계속해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려 한다면 국립대학으로 존재해야 할 이유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서울대가 해온 순기능도 많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적으로 서울대가 어떤 시선으로 비쳐지고 있는지 내부의 자성적 고민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