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산머루 열매이정환
와인 열풍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와인 소비량이 5년 만에 1.6배나 늘어났고, 수입 와인 시장 규모도 눈에 띄게 커지고 있다. '와인 대전'이란 이름의 특가 판매 이벤트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모 증권사에서는 이른바 '와인 펀드'까지 판매를 시작했다고 하니, 어느 신문 표현처럼 "와인은 이제 일상"이 된 것 같다.
하지만 활짝 열린 '와인 시대'에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아직 '주변인'에 머무르는 '토종 와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시각에 따라 와인이 '과실주'로도 해석된다는 점에 비춰보면, '포도로 만든 술'만 각광받으라는 법은 없다. 최근 호평 받고 있는 '산머루로 만든 술'도 와인이 분명하다.
"와인은 기본적으로 똑같아요. 과실로 만든 술이니까요. 그런데 요즘 '와인'하면 포도주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문제죠. 우리 전통주들 다 와인이에요. 산머루도 세계화할 수 있어요. 세계적인 브랜드로 충분히 자리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 | 토종 과일 머루의 힘 | | | | 웰빙 바람 속에 와인 보도가 연일 나오고 있다. 레드 와인이 심장 질환 예방이나 항암 효과가 있다는 것은 거의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정작 토종 과실인 머루가 갖고 있는 탁월한 웰빙 효과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고 있다.
대한암예방학회가 발표한 '암을 이기는 한국인의 음식들'에 의하면, 머루주가 포도주보다 훨씬 뛰어난 항암 효과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항암 효능을 갖고 있는 폴리페놀과 레스베라트롤 성분이 포도주에 비해 각각 2배와 5배가 더 높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머루는 타임지가 선정한 10대 건강 식품에 포함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산머루 와인'의 맛도 포도 와인의 그것에 손색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와인전문기관인 서울와인스쿨 총동문회가 주최한 블라인드(정보 숨김) 테스트에서 최고의 극찬을 받았다는 보도도 나온 바 있다. / 이정환 | | | | |
경기도에서 아버지와 함께 산머루 농원을 운영하는 서충원(30)씨의 말이다. '산머루의 세계화', 그냥 '농원'이 아니기에 대충 들리지 않는다.
산머루 농원에는 머루 과수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머루즙·머루주 생산 공장은 물론, 머루 발효실, 저온 저장고, 지하저장터널, 창고 등을 모두 갖춘, '산머루 가공 단지'다. 공장에는 에어 샤워실까지 갖추고 있을 정도다.
이 같은 '외형'은 물론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다. 온갖 시행착오 끝에 머루주를 세상에 내놓은 아버지 서우석씨의 집념과 '아버지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유(有)'를 기꺼이 끌어안은 아들의 결심이 맞물린 결과였다. "아버지의 말씀이 저것"이라는 '산머루의 세계화' 펼침막 앞에서, 지난 7일 충원씨와 마주 앉았다.
첫 번째 길잡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아버지"
"중학교 3학년 때였어요. 농업고등학교를 가겠다고 그랬죠.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 하지 않겠냐'하셔서 인문계로 진학했지만, 어려서부터 너무 당연하게 아버지 일을 이어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까웠거든요, 아버지 대에서 끝난다는 자체가.아버지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으니까요."
충원씨에게는 특히 그랬을 아버지였다. 감악산에서 흑염소를 키우던 서우석씨가 야생 머루를 재배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25년 전. 재배가 가능한 산머루 묘목을 구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시기였다. 어렵사리 시작한 재배라고, 시행착오가 비껴갈리 없었다. 5년 동안 애지중지 키웠던 머루나무 1500그루 중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겨우 세 그루만 살아남은 적도 있다고 한다.
▲이정환
충원씨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또 한 번의 고비가 찾아왔다. 우루과이 라운드로 농산물 시장이 심대한 타격을 입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는 '가공'으로 눈을 돌렸다. 머루즙과 머루주를 만들기 시작했고, 대기업 퇴직자를 초빙해 '술 공부'도 했다. 숙성을 위해서는 무형문화재 장인에게 오지 항아리를 주문했다. 비싼 오크통 대신 선택한 '유(有)'였다.
10년을 넘는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1995년에 농림부로부터 전통식품개발 승인업체로 지정받은 것이다.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한 아들도 '순풍'을 탔다. 수능을 보고 4년제 대학 경영학과 합격 통지서도 받았다. 하지만 부자(父子)는 의외의 고민거리를 만나게 된다. 변수는 한국농업대학(전 한국농업전문학교) 개교였다.
"갈등이 많았어요. 1기잖아요. 아무래도 진로가 불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만 해도 이름이 한국농업전문학교였잖아요. 대학이란 말도 없고. 솔직히 상당히 많이 꺼렸었죠. 하지만 부모님이 적극적으로 추천하시고, 저도 어차피 내 뜻이 이렇다고 하면 한 번 가보자."
한국농업대학에서 기초를 닦고 인연을 얻다
| | "한국농업대학, 확고한 의지가 제1 조건" | | | | 서충원씨는 한국농업대학 개교 10주년을 맞아 올해 '자랑스런 한농대인'으로 선정됐다. 여러모로 한국농업대학의 '스타'로 불릴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누구나 충원씨처럼 아버지가 닦아 놓은 기반이 있을 수는 없는 일.
이에 대해 충원씨는 "기반이 없는 친구 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안타깝다. 아무래도 기반이 없으면 어려운 점이 많이 있게 마련"이라면서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한국농업대학을 가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다른 길을 찾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충원씨는 "농업이 단시간에 승부를 볼 수 있는 산업이 아닌 만큼, 길게 보고 열심히, 꾸준히 하다 보면 길이 보일 것"이라며 "농업으로 성공하겠다는, 본인의 확고한 의지만 있다면 꼭 가라고 권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 이정환 | | | | | |
벌써 졸업한 지 7년, 어느덧 충원씨도 서른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산머루 농원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덩치가 커졌다. 2000년 졸업 당시만 해도 5억 원 규모였던 1년 매출액이 작년에 16억 원을 기록했다고 한다. 맞춤 농장사업으로 지정, 경기도에서 20억 원 규모의 지원을 받아 제품 생산 시설도 현대화했다.
현재 산머루 농원 제품은 국내에서는 대형 할인점이나 유기농 매장을 중심으로 유통되고 있다. 미국, 일본, 홍콩, 중국, 싱가포르 등 해외로도 수출된다. 7천평 규모의 과수원에서 수확하는 머루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산머루 농원이 다른 농가로부터 머루를 공급받는 이유다.
허나 함께 먹고사는 농가가 80여 개에 이르는 만큼, '원재료'가 모두 한결같을 수는 없다. "그냥 까맣게 익었다"고 모두 같은 맛이 아니니, '품질'을 놓고 신경전도 자주 벌어진다는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충원씨는 한국농업대학에서 배운 '기초'가 큰 힘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냥 까맣게 익었다고 수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맛을 봤을 때 차이가 나죠. 똑같이 보이는 까만 머루라고 해도, 이틀 완숙과 열흘 것은 맛 차이가 클 수밖에 없어요. 이런 걸 뭘 알아야 얘기할 것 아니에요? 물론 산머루 재배에서는 아버지가 전문가지만, 역시 농업의 기본을 알아야 하니까요.
학교 다니면서 작물 생리라든가 기초를 닦을 수 있었죠. 현장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지금 나름대로 얘기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죠. 아무 것도 모르고 산머루주만 만들고 있으면 장사꾼 아니겠어요? 다른 농과 대학에 비해 우리 학교가 실습 위주라는 점도 큰 도움이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