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만주에서 평양으로 귀향하여 정의여중을 다닐 때의 모습. 뒷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박 이사장여성신문
조선시대 가장 차별을 받았던 평양은 어느 곳보다 일찍 개화한 곳이었다. 박영숙의 부모도 서양문물의 선진화에 눈뜬 평양 사람이었다. 자신들은 기독교인이 되지 않았지만 기독교가 교육과 의료에 앞선 문화를 가지고 있음을 알고 그 부유함을 누릴 줄 아는 개화인이었다.
그들은 자녀교육에 도움을 준다고 믿었던 교회에 자녀들을 기꺼이 보냈고, 자녀들이 병치레를 할 때마다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병원을 찾으며 새로운 문물에 몸과 마음을 열었던 개화된 집이었다. 아버지보다 2살 위였던 어머니는 6남매를 3살 터울로 나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까지는 전업주부였다. 아버지는 도요타 회사의 대체에너지를 연구하던 연구원이었다.
박영숙의 집은 평양의 중심가였던 대동강변 수동이었다. 그곳은 중국 호떡집들과 중국 상인들이 많아 번창하기도 했던 곳인 동시에 일제 강점기로 인해 중국 사람들이 차별받던 곳이기도 했다. 민족차별이 당연시 여겨지던 시절, 선의의 거짓말이 난무하던 시절의 어수선함이 성장기 아이들의 내면을 차지하던 불운의 시기이기도 했다.
만주에서 중국인들이 조선 사람을 때려죽였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은 평양에 있던 중국 상인들을 때려죽이는 폭력사태를 일으킬 정도의 민족적인 끈을 느끼게 하는 반면, 일본의 강한 식민정책으로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던 혼돈의 시대였다.
박영숙이 9살 되던 해 29세이던 아버지가 장이 잘못되어서 돌아가셨는데 아마 암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 병을 고치기 위해 6남매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천지사방을 찾아다녔지만 결국 아버지는 서울 청량리 병원에서 숨을 거두셨다.
"아버지의 사망이 내겐 첫번째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어머니가 6명의 아이를 데리고 과부가 되셔서 가족을 책임지게 되어 암담한 현실에 놓이자 아버지 회사 중역이 찾아와 자녀 둘을 사장 댁에 양자로 들여보내라고 권했다. 공부를 많이 하지 않으셨던 어머니, 그는 세상 경험도 별로 없는 젊은 과부였지만 아이들의 의견을 물은 후 결정하겠다고 하셨다. 그것이 내게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어머니와 함께 있겠다고 해서 아무도 양자로 보내지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에게 큰 축복이었던 것 같다."
양자로 보내면 아이들에게 보장된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기 쉬운 상황에서 아이들을 지켜낸 것이나, 딸들을 애보기로 보내는 것은 당시에 너무나 흔한 상황이었는데도 가정이 어렵다고 딸들을 다른 집 애보기로 보내지 않은 어머니의 현명한 처사는 가족의 울타리를 굳건히 지켜낸 여전사의 모습이었다.
"여성의식이 언제부터 생겼느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나는 사회적으로 활동하기 이전에는 차별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지역의 분위기도 그랬지만 집 분위기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것이었다. 호떡을 사와도 똑같이 나누고, 밥을 푸는 것도 아버지 것을 먼저 푸고 자녀들은 태어난 순서대로 했다."
한명도 양자 안보내고 6남매 키운 어머니
잠시 만주로 이사갔다 해방직후 평양 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