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능 아래 여기저기 피어있는 나팔꽃, 우리 메꽃보다 덜 예쁘다조명자
박물관과 곽거병 묘를 돌아 나와 한무제 능으로 향했다. 곽거병 묘에서 불과 300여 미터 떨어진 무제 능은 마치 작은 동산 같았다.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무제는 재위 기간만도 54년에 달한다.
전한 시대의 묘제는 황제가 즉위한 다음 해부터 황제 묘를 조성하기 시작한다니까 무릉의 축조 기간은 무려 53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다. 소금과 철을 국가 전매제로 묶고, 균수 평준법, 화폐(오수전) 주조권을 장악해 국가경제를 튼튼히 만든 무제는 그 유명한 사가 '사마천'을 궁형에 처할 만큼 실정도 많았다.
위청과 곽거병 등의 명장과 삼천갑자 '동방삭' 같은 문관을 등용해 현치를 이끌었던 반면 통치 기간 내내 흉노족과의 장기간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사실 흉노족과의 일전은 선대로부터 당해 온 치욕을 되갚는 일이었다.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를 창건한 한 고조 유방은 즉위 후 그 여세를 몰아 흉노족 정벌에 나선다. 그러나 강력한 기마민족이었던 흉노족에 번번이 패해 마침내 굴욕적인 화친을 맺고 만다.
매년 조공을 바치는 것은 물론 한나라 공주를 흉노 왕 선우에게 시집 보낸다는 불평등 계약은 말이 화친이지 식민지나 진배없는 굴욕적인 항복 선언이었다. 그때부터 흉노족에게 바치기 시작한 조공은 이후 300년 동안 이어진다.
한무제(기원전 156~87), 그는 한나라를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시킨 경제의 아들이다. 할아버지 문제와 아버지 양제의 탄탄한 업적을 이어받은 무제는 흉노족에게 당한 300년의 치욕을 되갚겠다고 133년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50년을 끈 이 전쟁도 기동성이 뛰어난 기마민족인 흉노족의 기세는 결국 꺾지 못한다.
무제는 흉노족과의 전쟁이 얼마나 지긋지긋했던지 "앞으로는 흉노족과 전쟁을 벌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천하를 호령한 영웅호걸이나 이름 없는 범부 모두 죽어 흙으로 돌아가면 그게 그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