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록수 최용신에게 애국장을 추서한 우리의 영웅 김우경 (74세) 선생님라영수
최용신을 찾아서
심훈의 소설 <상록수>는 실제 모델이었던 최용신(1909년 8월 12일~1935년 1월 23일) 선생의 사후 1년 후인 1935년 동지에 <동아일보> 연재소설로 발표되었고, 최용신 선생은 소설 속에서 연애하는 주인공으로 인기를 누린 후 세간에서 잊히고 말았다.
동백장을 추서 받은 최용신 선생의 업적은 그 이상의 서훈으로도 모자람이 없음을 많은 국민이 이제는 알 것이다.
최용신 선생에게 동백장을 추서한 주체는 어디였을까? 우리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보훈처 또는 농림부가, 또는 그를 안산샘골로 파견한 YWCA가, 또는 루시동창회가, 또는 당시 샘골교회가, 또는 안산시가, 또는 경기도가 이 작업을 하였을까?
아니다! 놀랍게도 그 주체는 국가도, 그 어느 단체도, 기관도 아니었다. 안산에서 태어나 안산과 역동기의 역사를 함께하고 이제는 노인이 되어버린 김우경(74) 선생 개인의 열정으로 일구어낸 결과였다.
김우경 선생은 1933년 안산 둔대리에서 태어나 평생을 안산에서 지냈다. 조실부모하여 큰 공부는 하지 못하였으나, 6.25전쟁에는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안산 근교 수리산전투에 참여하였다. 직장을 다니며 어렵게 공부하던 중,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나던 무렵 당시 20세의 김우경 선생은 소설 <상록수>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김우경 선생님이 돌이 될 때 안산에서는 최용신 선생이 세상을 떠나는 아주 특별한 사건이 일어났고 최용신 선생의 직전 제자이신 자형(홍석필 장로)의 영향도 있었다. 최용신 선생을 자신에게 숙명적인 사람으로 받아들인 김우경 선생은 최용신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 무엇이건 하여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우선 신학교에 들어가 신앙인의 자세를 배웠고 안산으로 내려와 최용신 선생의 체취가 남아있는 유품을 모으는 일을 시작하였다. 1934년 최용신 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생의 유품을 제자들이 하나씩 나누어서 간직하였으나 김우경 선생의 뜻에 호응하는 제자들이 유품을 모을 수 있도록 협력하였다.
이에 힘입은 김우경 선생은 좀 더 구체적인 방법으로 최용신 선생의 발자취를 찾아보며 그 숭고한 얼을 이어받을 방법을 강구하였다. 1.4후퇴 때 폭격으로 소실한 강습소를 1960년 다시 지었고, 김우경 선생은 최용신 선생이 하시던 대로 야학을 열었다. 2개 반을 10년 동안 운영, 1970년까지 계속하였고 3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야학을 시작한 1960년부터 김우경 선생은 최용신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모든 자료를 수집 정리하였고 30년 이상 모아온 자료를 바탕으로 1994년 11월 28일 국가보훈처에 최용신 선생을 위한 품의를 올렸다. 그 결과 1995년 9월, 30여 년의 염원이 이뤄져 애족장을 받게 되었다. 김우경 선생이 인생의 황혼인 회갑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