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탑이승철
"아직도 초가집이 있었네. 저 왼쪽에 보이는 저거 초가집이잖아?"
옛 수덕여관이었다. 이곳에 몇 번인가 왔었다는 이 친구는 그러나 수덕여관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 수덕여관에 얽힌 이야기도 모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수덕여관 아주 유명한 곳이야. 어쩌면 오늘 우리들이 오르려고 찾아온 저 덕숭산보다 더 유명할 걸."
수덕여관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세상에 많은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곳이다. 이야기의 중심은 단연 비구니 일엽이었다.
그녀는 일제치하에서 일본에 유학한 신여성이며 기자이고 문필가였다. 이미 결혼한 유부녀였지만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인 남자와의 사이에 아들까지 낳았다. 귀국한 그녀는 서울에서 다시 염문을 뿌리다가 1928년 33세의 나이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비구니가 된 일엽이 수행하며 머물렀던 곳이 이곳 수덕사의 환희대인데 언젠가 헐리고 지금은 견성암으로 바뀐 곳이다.
그런데 당시 일엽과 더불어 신여성으로 대표되던 또 하나의 여성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파리유학파 화가였던 나혜석이었다. 그녀도 3명의 자녀까지 낳은 몸으로 이혼하고 일엽을 찾아와 만공선사의 문하에 들고자 6년 동안이나 묵은 곳이 바로 이 수덕여관이었다.
나혜석이 이 수덕여관에 머물고 있던 시기에 일본에서 낳은 일엽의 어린 아들 김태신이 몇 번이나 어머니를 찾아와 머문 곳도 이 수덕여관이었다. 그러나 김태신은 어머니 일엽으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김태신은 나혜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화가로 성공했지만, 67세의 늦은 나이에 결국 출가하여 지금은 직지사에서 수행 중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얼마 전 그가 어머니 일엽을 그리는 마음을 담은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그 책에는 "나는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자락에 엉겨 붙은 눈물 같은 존재였습니다"면서 "나의 고독과 절망, 나의 기쁨과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라고 어머니 일엽에 대한 심정을 토로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