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을 응원하게 만드는 추리소설!

[서평] 다카노 가즈아키의 <그레이브 디거>

등록 2007.07.06 08:28수정 2007.07.06 09:18
0
원고료로 응원
<13계단> 겉표지
<13계단> 겉표지황금가지
추리소설은 주인공을 응원하게 만든다. 그가 어서 단서를 잡아내기를, 그럼으로써 사건을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주인공이 형사나 탐정일 때, 많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13계단>으로 국내 추리소설계에서 입지를 굳혔던 다카노 가즈아키는 '악당'을 응원하게 만든다. 이유는 무엇일까? 악당들의 행동에 흐릿하지만 분명한 휴머니즘의 색채를 씌웠기 때문이다.


험악한 인상 때문에 어디서나 범죄자 취급을 받는 아가미. 인상뿐만 아니라 실제 행동도 그런 탓에 범죄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런 그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골수를 기증하기로 한다. 충동적인 선택일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처음으로 남을 돕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데 이식 수술 전날에 기막힌 일이 생긴다. 아가미의 방에서 살고 있던 친구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는 왜 살해당할 것일까? 평소에 아가미는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그 친구와 방을 바꿔 쓰고 있었다. 때문에 그가 아가미를 대신해서 살해당한 것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사실일까? 그것을 따져보기도 전에 아가미는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정체 모를 남자들이 아가미를 추적하기 때문이다.

아가미를 추적하는 것은 이상한 남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찰들도 아가미를 추적한다. 연쇄살인이 계속해서 발생했는데 아가미의 방에서 죽은 남자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졸지에 아가미는 양쪽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골수 이식 수술 하루 전날에 말이다.

<그레이브 디거> 겉표지
<그레이브 디거> 겉표지황금가지
<그레이브 디거>의 재미는 아가미의 도주에서 시작한다. 경찰들과 정체 모를 세력을 피해 아가미는 모든 것을 동원해 도주극을 벌인다. 무엇을 위한 도주인가? 단지 살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레이브 디거>는 꽤 지루한 책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레이브 디거>는 감동적이다. 아가미의 도주가 시한부 인생을 구하기 위해, 즉 체포당하지 않고 병원으로 가기 위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아가미는 응원을 받게 된다. 그가 잡히면, 살아날 수도 있을 누군가가 죽는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강조되기 때문이다. 다카노 가즈아키는 영리한 방법으로 주인공과 독자들을 연결시켜 준 셈이다.


물론 <그레이브 디거>의 재미는 도주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13계단>에서 보여줬던 교묘한 트릭과 반전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트릭은 연쇄살인에서 비롯된다. '그레이브 디거'라는 용어는 중세 종교재판과 관련이 있다. 피해자들이 살해당하는 방법도 그것과 관련이 있다. 심상치 않은 연쇄살인범의 등장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건이 아가미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그것을 추측해보는 것은 꽤 재밌는 일이다. 물론 그 끝에서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허를 찔리는 일이 생길 테지만, 그것 또한 추리소설의 재미이니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13계단>에서 보여줬던 재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다 끈질긴 '도주'가 주를 이루는지라 소설이 역동적으로 흘러간다. 더군다나 악당을 응원하게 만드는 상황까지 만들었으니, <그레이브 디거>는 <13계단>에 이어 다카노 가즈아키의 입지를 굳히는데 한몫 할 것으로 보인다. 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는 추리소설을 보여주니 당연한 것이리라.

그레이브 디거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전새롬 옮김,
황금가지, 2007


#13계단 #그레이브 디거 #다카노 가즈아키 #추리소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2. 2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천재·개혁파? 결국은 '김건희 호위무사'
  3. 3 미 대선, 20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사태 벌어질 수도 미 대선, 200여 년 만에 처음 보는 사태 벌어질 수도
  4. 4 "민주당 지지할 거면 왜 탈북했어?" 분단 이념의 폭력성 "민주당 지지할 거면 왜 탈북했어?" 분단 이념의 폭력성
  5. 5 "김건희·명태균 의혹에... 지금 대한민국은 무정부 상태" "김건희·명태균 의혹에... 지금 대한민국은 무정부 상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