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아람동지회가 5일 오전 서초동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인병문
물고문·통닭구이... 제자 고문당하는 장면도 보여줘
불법으로 감금된지 이튿날부터 경찰의 매서운 고문과 협박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34일간 계속됐다. 개정 전 헌법 제11조 제1항 및 3항, 형사소송법 제207조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악행이었다. 이들은 미리 준비한 메모지의 각본대로 허위자백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만일 본인이 불응하거나 위반 사실이 없다고 할 때는 영락없이 짓밟고, 때리고, 턱이 뽑히고 머리를 쥐어뜯기는 구타가 시작되었다.
불법으로 잡혀온 이후 대략 일주일가량 수면을 취하지 못하게 하였다. 옆에는 전투경찰이 교대로 근무하면서 일체 잠을 재우지 않았다. 잠을 자고 싶어도 운동경기장에서나 쓸법한 밝기의 전등(써치라이트)을 눈에 비추는 바람에 결코 잠을 잘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찰의 조작된 각본에 의한 강제 허위자백이 안 나올 때는 주먹 등으로 개 패듯이 두들겨 팼다.
그래도 경찰의 조작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길이 80cm 가량, 두께 3.5~4cm 가량의 몽둥이로 사정없이 패댔다. 군대에서나 있을 법한 원산폭격을 시키고, 엉덩이를 차는 등 인격파괴 행위를 유발하는 고문이 다반사로 행해졌다. 날이 거듭할수록 그 도는 더하여져서 내가 경찰의 조작에 불응하면 수사관은 지하실 내의 복도에 설치된 욕조대로 끌고 가 머리를 억지로 끌어당겨 얼굴을 물속에 처박아 질식케 하는 고문을 하루에도 수차례 감행하였다. 이른바 '물고문'이다.
제자들이 당하는 고문현장도 들여다보게 하였다. 유리를 통해 들어온 장면은 제자가 맞아서 머리모양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모습이었다. 조사실에서 들려오는 제자의 비명소리는 고통에 울부짖는 짐승의 소리 같았다. 선생으로서 제자의 비명소리를 듣는 정신적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반복되는 지겨운 고문에 시달리면서도 스스로 "여기서 살아나가야 한다, 죽어서는 안 된다"는 최면을 걸며 이겨나갔다. 불법구금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오히려 초조해진 경찰은 그들 뜻대로 사건조작이 안 되자 짐승보다 못하게 고문의 강도를 더욱 높여나갔다. 고통을 주는 고문의 빈도도 늘어나고 수법 또한 악랄해졌다.
조사실에서는 손을 뒤로 하여 수갑을 채우고 무릎을 끓이고 굽힌 무릎 사이에 각목을 끼운 채 발로 무릎 위를 수없이 밟아댔다. 무릎이 탈골되고 잘려 나가는듯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인내해야만 했다. 시간이 갈수록 고문의 강도는 더해갔다. 끝까지 경찰의 사건조작에 불응하면 이번에는 조사실에서 벗어나 눈이 가려진 채 별도의 고문실로 이동해 발가벗겼다. 두 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무릎 사이에는 굵은 각목이 끼워진 채 두 책상 사이로 거꾸로 매달려졌다(일명 통닭구이). 그리고는 얼굴에 수건이 덮어졌다.
수사관들의 질문이 들어온다. "우리가 밝힌 게 사실이냐, 아니냐". 경찰의 사건조작을 강력히 항의하면 얼굴에 씌어진 수건 위로 주전자물이 정신없이 쏟아져 수건이 젖어온다. 젖은 수건은 수막현상을 일으켜 숨을 쉴 수 없는 고통과 함께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온다.
견디다 못해 "차라리 죽이라"고 고함을 치면 수사관들은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다.
"그래 죽여주겠다. 그러면 빨강볼펜으로 '나는 빨갱이 짓을 하다가 죽었다'는 유서를 써라, 그러면 죽여서 가마니에 돌돌 말아 길거리에 버려주겠다."
이런 고문행위가 몇 차례 진행되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 결국 불법수사의 막바지에 달한 어느 날, 도살장에 끌려온 짐승처럼 숱한 고문에 지칠대로 지쳐서 거의 반사(半死)상태에 빠진 나는 본능적인 처절한 삶의 욕구로 경찰관이 불러주는 조작된 허위사실에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머리를 끄덕이는 것만으로 이른바 '아람회사건'은 조작되고 진술서가 작성되었다.
담당검사 "다시 경찰서 지하실로 끌고가겠다" 협박
경찰의 진술서는 한두 번에 작성되는 게 아니었다. 수사관의 조작된 사건 시나리오에 맞아 들어갈 때까지 수십 번의 수정과 수정을 거쳐 최종 진술서가 작성되었다. 최후로 강제 작성된 진술서조차 시인하지 않고, 지장을 찍지 않으려 하면 또 다시 구타가 시작되고 물고문이 가해지고, 통닭구이를 하겠다는 공갈과 협박이 들어왔다.
뿐만 아니었다. 자유의지가 아닌 경찰에 의해 강제로 지장이 찍힌 허위진술서는 녹음기에 녹취되어 주야로 반복 청취되었다. 반복 청취되는 과정에서 실제상황처럼 착각되어갔다. 녹음기에 녹취된 내용처럼 내 자신이 저 북에서 내려온 '빨갱이'처럼 착각현상을 일으켰다. 이렇게 정신착란, 피해망상, 공포심 등 심리적 강제 속에서 범죄서류가 모두 조작되었다.
검사의 조서과정에서도 철저한 불법이 자행됐다. 당시 형사소송법 제200조에 의하면 피의자에게 진술거부권과 변호사 선임권이 있음을 고지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검사는 이러한 진술거부권의 권리를 심문 전에 말한 사실이 전혀 없다.
오히려 진술을 거부하거나 양심대로 진술하면 검사 스스로가 "다시 경찰서 지하실로 끌고 가 재수사 하겠다"는 협박으로 위협해 왔다. 진술 중에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과 함께 경찰조서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면 검사는 경찰이 작성한 두꺼운 수사가록으로 내 머리를 여러 차례 반복하여 때렸다.
또 당시 형사소송법 제313조 규정에 의하면 검찰조서는 신빙할 수 있는 상황 하에서 작성되어야 했다. 그러나 검사는 경찰에서 불법의 장기구속, 심한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문 등 정신적 심약상태에 놓여 있다는 호소를 묵살했다. 오히려 경찰수사 당시의 공포심, 불안감, 피해망상 등의 분위기를 더욱 유발시키고 심지어 이를 즐기는 듯한 묘한 미소를 띠기도 했다.
이렇게 기망과 협박이 난무하는 분위기에서 새벽 0시에서 4시까지 사이에 피의자심문조서가 일괄 작성되었다. 더구나 당시 형사소송법 제317조 규정에 의하면 피의자 진술은 임의로 진술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검사조사실에서 작성된 피의자심문조서는 전혀 임의성이 없는 상황에서 작성되었다. 경찰조사 당시의 고문담당 사법경찰관, 수사담당 사법경찰관 등 전원(5명)이 내 뒤를 에워싼 가운데 1, 2차 심문조서가 작성되어 강제로 지장이 찍혀졌다.
또 검사심문에 들어가기 전에 대전경찰서 정보과에서 수사경찰관이 마치 입시수험생에게 하듯 수사 자료의 반복 암기와 질의응답을 강요하였다. 경찰조사에서 말한 대로 동일문장과 대답을 하지 않을 때는 "지하실에 들어가 재수사 하겠다"는 협박과 공갈을 받고 검사조사실에 들어갔다.
대전교도소 수감 후 검사실에서 4차례에 걸친 심문조서 작성 때도 포승으로 2~3겹 묶이고, 2개의 수갑이 2중으로 채워졌다. 검찰 피의자심문조서는 경찰수사기록 내용을 일방적으로 구성ㆍ요약하여 검사가 불러주는 대로 입회서기가 타자 작성하였다.
이렇듯 불법적으로 작성된 경찰․검찰 심문조사에도 불구하고 삼권분립의 한 축인 재판부마저 행정부가 강제 조작한 아람회를 국가전복의 범의를 가진 반국가단체로 마름질했다. 그 후 항소심 고등법원(재판장 이정락)에서 반국가단체 결성부분에 대하여 무죄가 판결되었으나 대법원 형사부는 다시 "국가보안법상의 결사나 집단의 구성은 명칭, 회칙, 대표자 선임, 결단식 등 형식요건을 가지지 않아도 두 사람 이상이 임의적으로 공동목적을 갖고 계속적으로 결합했다면 반국가단체 구성으로 보아야 한다"(1982. 10. 19)는 허무맹랑한 판결을 내렸다.
이렇게 국가 폭력에 의해 조작된 이른바 '아람회사건' 구성원들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등 위반으로 박해전 10년, 황보윤식 7년, 정해숙 5년, 김난수 4년(군법회의), 김창근 1년 6월 선고를 받고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억울한 옥살이를 한 지 2년 6개월만인 1983년 12월 23일 형집행정지로 출소하였다.
출소 당시에도 어처구니없게 '전향서'를 쓰라고 했다.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므로 전향서를 쓸 수 없다"고 거부해 결국 전향서를 쓰지 않은 채 출소했다. 이후 피해자들은 10여 년간 동향감시를 당하고, 취업했던 직장에서마저 쫓겨나는 고통을 겪으며 가난의 극한상황까지 겪어야 했다. 당시에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무릎관절과 목 부분이 지금도 성치 않고, 피해망상형 정신분열증으로 정신불안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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