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웨일즈가 쓴 책 표지(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
그런 김산의 아리랑은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이며 역사가인 님 웨일즈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김산은 마지막 유언처럼 자신의 혁명 역정을 2달 동안 22회에 걸쳐 구술해 주었고, 님 웨일즈는 이를 7권의 공책으로 받아 적은 것이다. 이 기록이 바로 바로 뉴욕 '존 데이' 출판사에서 1941년 펴낸 < Song of Ariran >이다.
하지만 정작 김산의 고국인 한국에서 출간된 것은 1984년이 돼서이다. 조우화씨의 번역으로 김산과 님 웨일스의 대화 47년 만에 한글판으로 햇빛을 보았다.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조선과 수만리 밖의 중국 광동에서 한 조선 청년이 조선혁명운동을 하다 아리랑을 부르며 산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산은 열다섯 나이에 조국을 떠나 일본으로, 만주로, 상해로, 북경으로, 광동으로, 연안으로 중국을 헤매며 "혁명투쟁의 현장에 몸을 내던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섬 아닌 섬이 되어버린 분단국가의 남쪽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당시의 동아시아는 '한 세대 동안에 역사가 천 년이나 흘러가는 곳'이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33살 청년은 "내 인생에 행복했던 기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라고 했는데, 그를 대담한 님 웨일즈를 매료시켰다. 그것은 김 산의 폭넓은 체험, 특히 중국혁명에 투신했으면서도 중국공산당에 의해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국외자로서의 위치에서 얻은 성찰과 고통이 의롭게 전해져 왔기 때문이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
동지여, 동지여 나의 동지여
그대 열두 구비에서 멈추지 않으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열세 구비를 넘으리니."
역시 김산이 부른 이 '아리랑옥중가'를 보면 그가 아리랑을 열두 고개로 끝내지 않고, 승리의 열세 고개를 넘으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김산에게 있어서 '아리랑'은 절망이 아니라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희망의 끈이었을 게다.
음반은 김산의 연보를 비롯한 자세한 해설서가 들어있고, 영문으로 된 원문과 번역문이 함께 실려 있어 알차다는 느낌을 받는다.
음반은 맨 처음 "아리랑, 심금을 울려주는 선율(Arirang, The Heart-String Ringing Melody)"이라는 김산이 정의하는 아리랑을 들려준다. 그리고 아리랑은 사형수의 노래였다는 것과 아리랑은 죽음의 노래가 아니라 삶의 노래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