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개울에 엎드려 짐승처럼 물을 마시다

휴식을 위한 초록여행(3)

등록 2007.06.30 19:49수정 2007.07.01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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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천 개울
오대천 개울박도
인연이 깊은 천년고찰

적광전 옆에서 바라본 팔각구층탑
적광전 옆에서 바라본 팔각구층탑박도
내가 천년 고찰(古刹)의 진수(眞髓)를 처음으로 맛본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 1박2일 수학여행으로 간 고향에서 가까운 황학산 직지사다. 그 다음이 월정사요, 상원사다.


이곳은 일찍이 나의 은사 지훈 조동탁 선생께서 일제 징용을 피해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의 외전 강사로 지내셨던 바, 강의시간에 자주 월정사 시절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대학 1학년 여름, 나를 끔찍이 챙겨주던 한 선배가 월정사 오대천 계곡에서 조난당하였기에 왠지 나와는 깊은 인연이 있는 고찰로 여겨왔다.

내가 학교에 있으면서 학생들을 데리고 수학여행 코스로 굳이 이곳을 수차례 다녀간 것도 오대천 계곡의 산수가 빼어남도 있지만 이런저런 인연의 끈 탓이었나 보다. 또 내가 첫 장편소설의 배경 무대를 이곳으로 정하고, 수차례 취재여행으로 이곳을 들렀으니 월정사는 내 발자국이 가장 많이 남은 천년 고찰이다.

1991년 겨울에는 폭설이 내린 다음 날 아들과 함께 이곳 선방에서 묵고는 이른 새벽 예불을 참배했던 적도 있었다. 그때는 한겨울로 하늘이 유리처럼 맑고 몹시 추웠다. 다행히 내 작품 속에 그 정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겨울 새벽의 월정사

식수대 불유각
식수대 불유각박도
‘뎅’ 하는 범종 소리에 잠을 깼다. 불상 앞 촛대에는 그때까지 촛불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시계를 봤더니 세 시가 조금 넘었다. 그 새 두어 시간 눈을 붙임 셈이다. 무리한 여정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가뿐했다.

갈증이 났다. 옷을 입고 뜰로 나왔다. 달이 어느 새 서편으로 기울어 있었고, 하늘의 별들이 잘 익은 석류 알처럼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했다.


범종각 옆 식수대로 갔더니 석간수가 졸졸 흘렀다. 영하의 찬 날씨였지만 식수대에서는 서릿김이 안개처럼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조롱 바가지로 물을 떠서 마셨다. 온몸이 오싹했다.

오대천 계곡으로 내려갔다. 개울에는 맑은 물이 조잘거렸다. 큰 돌멩이를 발판 삼아 웃옷을 벗고 세수를 했다. 손이 시리고 얼굴이 따가울 정도로 물이 찼지만 산뜻했다. 심호흡을 하자 가슴이 알싸했다.

상원사 쪽 계곡을 바라봤더니 새벽안개가 자욱이 깔려 있었다. 산짐승과 산새들은 모두 새벽잠을 자는 지 계곡에는 물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국보 제48호인 팔각구층석탑
국보 제48호인 팔각구층석탑박도
월정사 경내로 돌아오자 젊은 스님 두 분이 도량석(道場釋)을 하고 있었다. 독경과 함께 목탁을 두드리며 경내를 돌았다. 나도 그 뒤를 따랐다. 스님은 경내를 한 바퀴 돈 후 팔각구층석탑에서 탑돌이를 하면서 천수경을 독경했다.

“… 번뇌무진서원단 법문무량서원학 불도무상서원성 자성중생서원도 자성번뇌서원단….”

도량석을 끝낸 스님은 대법당 적광전으로 들어갔다. 주지 스님은 본존 불상 앞에 꿇어앉아 목탁을 두드렸고 또 다른 스님은 작은 종을 쳤다. 나는 스님이 내준 방석에 꿇어앉았다.

본존 불상은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 내려다보았다. 다게(茶偈)에 이어 석가모니불을 부르는 정근(精勤), 이어서 발원문이 낭랑히 흘렀다.

범종과 법고, 목어(木魚), 운판(雲板)이 울린다. 법당 안팎에서 울리는 이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공명이 되었다. -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에서


적광전의 본존불상
적광전의 본존불상박도
‘영원한 것은 없다’

종고루(鐘鼓樓)
종고루(鐘鼓樓)박도
그때의 범종각은 종고루(鐘鼓樓)로 식수대는 지붕조차 쓴 채 불유각(佛乳閣)으로 변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씀하신 바 있지만, 추억이 서린 인공물도 사람도 그 새 숱하게 사라졌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 고등학교 건물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도록 사라졌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도 모두 내 곁을 떠나셨다.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시던 친구도 스승도 여러 분 돌아가셨다. 나 또한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하지 않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경내를 한 바퀴 돌고는 대법당인 적광전에 들었다. 부처님께 우러러 삼배을 올리고 다시 밖으로 나와 팔각구층탑을 한 바퀴 돌았다. 죄 많은 인생이 무슨 복을 빌겠는가. 그저 알맞을 때 데려가 달라고 두 손을 모았다.

용금루를 거쳐 오대천으로 나가자 맑은 개울물이 돌돌돌 흘러내렸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나는 개울에 엎드려 짐승처럼 물을 마셨다. 참으로 오랜만에 개울 물을 간장이 시원하게 그대로 들이켰다.

경내를 한 바퀴 도는 새 버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투덜투덜 다시 전나무 숲길로 내려왔다. 저만치서 스님 한 분이 성큼성큼 다가오신다. 요즘은 스님들도 대부분 차를 타고 다니시는데 드문 광경이라 카메라에 담았다. 다시 몇 발자국을 옮기자 다람쥐 한 마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두 발을 열심이 비비고 있었다.

월정대가람을 벗어나자 곧 매표소 정류장이 나왔다. 올 때의 역순으로 거기서 버스를 타고 진부로, 장평으로, 방림삼거리로, 안흥장터 마을로 네 번을 갈아타고 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이른 뒤 서울서 내려온 딸과 같이 저녁밥을 먹었다. 오늘 아침밥을 먹고는 모두 아홉 번의 버스를 갈아타고 상원사와 월정사 탐방을 마친 뒤 다시 내 집에서 저녁밥을 먹을 수 있으니 참 세상 편리해졌다.

전나무 숲길을 걸어오시는 스님
전나무 숲길을 걸어오시는 스님박도
전나무 숲에서 만난 다람쥐
전나무 숲에서 만난 다람쥐박도
천수를 다한 전나무 고목
천수를 다한 전나무 고목박도
극락으로 가는 길
극락으로 가는 길박도
#오대천 #직지사 #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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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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